2011년 5월 20일 금요일

도라산을 돌아 (기행문)



3월 중순의 和暢한 봄날, 도라산과 판문점 자유의 집을 두루 다녀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불과 3週전,부시 대통령이 接敵地域의 최북단에 있는 이 작은 시골 마을의 新築驛舍에 나타남으로써 도라산은 세계뉴스의 각광을 숨가뿌게 받기도 한 곳이다.

도라산(都羅山)은 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에 있는 높이 156m의 작은 산봉우리다.
서기 879년, 新羅의 마지막 王인 敬順王이 서라벌(徐羅伐)에서 천리 길 멀리 떨어져 있던 松都(開城의 옛이름)를 찾아 가서 高麗에 항복하고 王建의 딸 樂浪公主를 취(娶)하면서도 옛일을 못 잊어 조석으로 이 봉우리에 올라와 新羅와 그 도읍지를 그리워 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故事가 있다.

도라산 역은 分斷상태에 있는 京義線 철도가 복원 되면 우리 나라 최북단 역이 된다.
이곳에 오는 길은 한국전쟁 당시 전쟁포로들의 自由를 찾는 길을 터 주었던 自由의 다리와는 별도로 새로 난 통일대교를 통하여 진입하게 된다.

造形美를 갖추고 아담하게 꾸며진 驛舍 와 주변 造景은 잘 가꾸어 져 있었고, 複線시발점 표지도 눈에 진하게 들어 온다.

도로와 교량 건설 등 토목공사와 환경 조성에 1,800 여억원의 공사비를 들였다니 南北分斷을 허무려는 화해.협력의 갈망을 象徵的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하였다.

統一部에 따르면 4월에 들어 陸路외에 서울에서 철도편으로 이곳에 올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이다.

이곳에는 北韓이 땅속을 파고 내려 왔던 고랑포의 제3 땅굴이 바로 도라산 밑에 있고, 1986년에 설치된 도라산 전망대에서는 北쪽의 개성시 변두리와 송악산을 비롯하여 금암골 協同農場과 기정동 마을, 김일성 동상 등을 바라 볼 수 있는 곳이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自由의집과 그 앞 우리 側의 제3초소에 닿으면 돌아 오지 않는 다리와 1976년 8월 18일 미루나무 도끼事件의 現場을 보게 된다.

지금은 짤려 져 없어진 미루나무의 자리에는 당시의 悲劇을 적은 돌 標識物만이 그 자리를 말 하듯 꽂혀 있다.

그리고 이상한 對稱現象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늘의 南과 北의 체제모습을 形象化 한 것 같은 곳이다.

自由의 마을로 불리는 南쪽의 대성동과 北쪽의 기정동은 국기 게양대의 크기로 氣 싸움을 한다. 1,800m의 거리를 두고 南쪽의 태극기는 국내 최고의 100m를 자랑 하지만,北쪽 人共旗는 세계 제1의 160m높이와 쌀 세 가마니 무게의 250kg 깃발의 威容을  뽐내고 있는 모습이다.

대성동은  45 가구 250 여명의 주민들이 4만평의 땅을 경작하면서 수십년을 살아 오고 있는 日常의 마을인데 北쪽 기정동은 사람 없는 황량한 빈 집의 골짜기 이다.

南北對話는 1971년부터 시작되어 작년 말 까지 30년 동안 총 376회를 거듭하여 왔으나 대화의 성격은 솔직함과 진심이 없는 정치공작과 첩보전의 連續이 었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이산가족을 보는 視角만 하여도 우리는 인도주의 원칙을 추구하는데 反해, 北쪽은 정치적, 체제적 문제로 다루고 있지 않은가? 
이런 형국에 北녘 凍土의 땅을 향해 순진하게 목청을 높여 불러도 대답을 주지 않는 沈黙의 메아리만 안쓰럽다.

이곳 自由의 집은 南北의 交流와 協力과 동포의 만남을 위한 장소인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검은 안경의 마네킹처럼 微動도 않고 태권도 騎馬姿勢로 敵兵을 노려 보고 있는 우리의 경비병의 모습에서 여기가 分斷現實의 “最前方”(In Front of Them All)임을 느낄 수 있으며, 韓半島 冷戰이 事實임을 또한 일깨우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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