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2일 일요일

소프트 파워와 평양


    
-- 영국의 경제잡지 The Economist는 2008년 2월 26일, 뉴욕 필의 평양 공연 기사를 내면서, 오케스트라 외교가 잔인한 정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이 글은 The Economist의 기사를 정리한 것이다. --


뉴욕 필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뉴욕교향악단)의 평양 연주회에 참석한 북한 청중들에게는, 적어도 90분의 시간은 55년간의 냉전 적대 행위가 끝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북한 주민들은 그들의 적의 음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 했으며,  평양의 미국 손님들은 하여간, 해동의 시작을 말하는 것에 놀라워했다.

경제적으로 파탄된 나라의 시민들은 쉽사리 희망을 잡으려 한다.  자주 일어나는 정전은 전력의 부족을 의미한다.  난방은 변덕스럽다.  식품 가격은 치솟고 있다.  

버스는 미국 손님들을 정상적 사회 활동이 전혀 없는 눈 먼지가 쌓인 황량한 거리를 따라 실어 날랐다.

거리에는 드문드문 오가는 차량뿐이며, 불빛도 없고, 사람도 거의 없다.  버스는 만화로 그린 작은 미군 병사를 거대한 주먹으로 힘차게 내리치는 게시판 그림 옆을 지나갔다.

방북 전일에도, 평양의 매스컴은 전과 다름없이, 연주회에 참석하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미국이 일으킨 전쟁의 직접적 위험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경고했다.

하지만, 동 평양 대극장의 역사는 2월 26일에 이루어졌다.  무대 양편의 은색 깃대에 미국기와 인공기가  매달려 있었다.  1950년-1953년의 6.25전쟁이후, 성조기는 북한 지역에서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처음으로 많은 청중과 전체 북한 주민들이, 드물게 보는 TV와 라디오 생중계 덕분에,  미국 국가 “성조기” 연주를 들었다.

미국 국가의 연주는 뉴욕 필 상임지휘자 로린 마젤 (Lorin Maazel)이 1,000여 명의 청중의 기립 속의 평양 정권의 국가 바로 다음에 지휘했다.

청중 가운데 외국인은, 100여 명의 악단 단원들과 전 미 국방장관 윌리암 페리 그리고 이탈리아 백작의 부유한 일본인 미망인 요꼬 나가에 체치나도 있었다.

이 미망인은 이 도시가 6.25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잠시 점령된 이후, 평양을 방문하는 가장 큰 규모의 미국 대표단의 이번 방북 비용을 지원했다.

노동당과 김일성, 김 정일 부자에게 아첨하지 않는 공연을 경험한일이 없는, 대부분의 음악은 북한 주민들에게는 생소하다.

평양 정권은 서양 고전음악을 허용하되, 회수는 제한한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Dmitri Shostakovich)의 “레닌그라드” 교향곡 제1악장 (때로는 제4악장)과 “김 정일 장군 님에게 영광을”, 혁명 가극 “피바다” 등 평양 정권의 작품은 좋아하는 곡이다.

뉴욕 필의 프로그램은 또한 정권을 위한 선전의 다른 수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은 중간 음의 활기찬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의 오페라 “로엔그린 (Lohengrin) 결혼 행진곡” 3막 서곡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미극의 전통적인 고전 음악을 나타내는 두 작품, 드보르자크 (Antonin Dvorak)의 “신세계 교향곡” (체코 사람인 드보르자크는 이 곡을 미국에서 작곡했고, 뉴욕 필은 1893년에 첫 공연을 했다)과 조지 거슈윈 (George Gershwin)의 1928년의 작품 “파리의 미국인”이 뒤 따른다.

드보르자크의 유명한 (적어도 북한 주민이 아닌 사람들에게) 잉글리시호른 (목관 악기의 일종) 독주에는 일부 애처로운 반응이 있었다.

앙코르 곡은 조지 비제 (Georges Bizet)의 “아를르의 여인 (L'Arlesienne)”조곡으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에는 뉴욕 필의 일련의 인기곡이 연주되었다.

지휘자 마젤은 20세기의 위대한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작고한 그의 전임자 레오나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1918-1990)을 소개했다.  

그리고 그는 가상의 번스타인이 “캔디드 (Candide)” 서곡을 지휘하도록 무대에서 물러났다. 
(“캔디드”는 음악 희극으로, 젊은 캔디드와 그의 애인의 방랑을 통한 생에 대한 태도를 풍자적으로 그린 1956년 작품).


미국의 한 비평가는 이 연주곡이, 아마도 김 일가의 사후에, 그들이 생전 저지른 일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김 왕조를 비꼬아 말했다.

북한 청중들은 하나같이, 김일성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으며, 입장권은 팔지 않았고, 청중들은 모두 정권의 지도층들이다.

맨 마지막에 클라이맥스가 왔다.  한민족의 전통민요 “아리랑”의 첫 음표가 울리자 극장 안에 중얼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아리랑은 한반도의 남과 북 어디서나 친숙한 한민족의 멜로디이다.  그리고 통일을 갈망하는 선언하지 않은 송가이기도하다.

평양 정권은 매년 10만 명의 인원이 벌이는, 일련의 유연체조인 “아리랑 축제”를 행하고 있다.

뉴욕 필의 연주는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받았다.  평양 정권의 최고위 참석자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양 형섭 조차 쾌히  일어섰다.

미국인들은 기뻐 날뛰었다.  양각 호텔에 돌아와서 베풀어진 축연에서, 자린 메타(Zarin Mehta) 단장은 “줄잡아 말해서, 나는 오늘밤 달에 온 기분이다.”라고 단원들에게 말 했다.

마젤은 보도 기자들에게 뉴욕 필은 오랫동안 이와 같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말 했다.

청중 가운데 한 평양 주재 외교관은 말 했다. “왈츠를 연주 할 수 있었는데, 연주해도 문제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마침내, 북한 주민들을 기쁘게 했다.

미 국무부는 방북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뉴욕 필이 작년 8월, 평양으로부터 팩시밀리로 초대를 받았을 때, 정부가 손을 댔다.

대북 협상 대표인 크리스토퍼 힐은 초대에 응하라고 권고했다.  핵 문제의 미, 북 간 긴장이 누그러지기 시작하면서, 부시 대통령이 2002년, 이란과 이라크와 함께 평양 정권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뒤, 힐은 2007년 6월, 미국 관리로서는 처음 방북했다.

관현악단은 정치적 교착상태에서 친선대사로서 오래도록 행동했다.  1956년, 보스턴교향악단 (Boston Symphony Orchestra)은 소련에서 연주한 첫 미국의 저명한 앙상블이 되었다.

당시 번스타인 지휘하의 이 뉴욕 필도 3년  뒤에 따라 했다.  1973년, 뉴욕 필은 한 해 전 당시, 닉슨 대통령의 방중에 따른 미국의 중국과의 완전한 변화를 상징하는 행사로서 베이징에서 연주했다.

단장 메타는 지난 12월, 평양 방문을 발표하면서, “우리의 작은 심포니의 위대한 도약이다. 이 일의 뒷일은 외교관의 몫이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음악이 사람을 하나로 묶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 했다.

뉴욕 필로서는 다행히, 평양 정권은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말 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선전에서, 김 정일은 세부 내용까지 간섭하는 음악 관리자 (물론 아첨하여)로 알려져 있다.

1968년, 음악인들에 대한 연설에서, 당시 26세의 김 정일은 음악의 원칙은 혁명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 했다.

음악은 “시끄러운 서양 음악”에 근거해서는 안 되며, 위대한 수령 동지께서는 “밝고 명랑한 투쟁적인 행진곡”을 좋아 한다고 했다.

김 정일은 처음에는, “김일성은 우리의 태양” 노래는 D장조 음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E 장조가 낫다고 가르쳤다.

뉴욕 필은 평양 공연에서는 딱딱하지 않은 곡을 선택하기로 했다.  알맞은 공연 장소의 물색과 관현악단 그리고 악기를 그곳에 나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국가교향악단의 중심지인 모란봉극장은 너무 작아서 거절했다 (최근 김 정일의 지시로 새로 단장됐다. 국영보도기관은 잘난척하며, “하찮은 것이라도 지도자 동지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없다”고 떠벌렸다).

동 평양대극장은 더 크지만, 뉴욕 필의 음향의 음질 기준에 맞는 수정 작업이 필요했다 (평양 정권은 아무소리 없이, 음향 보호판 설치를 포함한 내부 개조 작업을 자비로 공사했다).

평양의 거친 겨울과 결딴난 경제 또한 장애물이었다.  공연 준비 팀은 악기를 북한에서 이리저리로 운송하는 동안 기온의 차이로 손상되는 것을 걱정했다.

공연 현장의 샹들리에 장식 로비 자체도 몹시 추웠다.  메타는 외무성 사무실에서 두터운 외투차림의 관리와 이야기를 나눴다.

한 외교관은 평양의 겨울 난방이 잘 되지 않아, 주재원들이 언제 샤워를 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고 불평한다고 말 한다.

북한에서 악기를 운송할 난방 장치된 트럭을 구할 수 없어, 뉴욕 필은 한국에서 나르도록 했다 (한국의 아시아나 항공의 보잉747기 제공으로, 뉴욕 필 자체의 평양 왕복 운항을 했다).

평양 정권은 호텔과 공연장의 충분한 난방을 약속했으며,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  메타는 자기 방의 찬 공기 통풍을 위해 하나의 창문은 봉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평양 정권은 평양의 삶의 현실 모습으로부터, 미국인들을 떼어 놓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아침 조깅 (달리기)하려했으나, 호텔 경비병의 제지로 되돌아왔다.  관리들은 외국인들을 호텔에 잡아두려고 했다.

택시도 없기 때문에, 평양의 대동강의 작은 섬 (?)에 세워진 이 호텔 (양각도 국제호텔)로부터 평양 본시가지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이곳에 48시간 머무르는 동안, 공연과 연습이 없을 때는 버스 한바퀴돌기로 김일성 동상을 포함한 시내 기념물 구경을 했다.

하지만, 인위적인 것과 진짜의 모든 이 우직함이 진실로 무엇인가 바꿀 수 있을까 ?

이 공연에 참석한 전 주한 미 대사 도날드 그레그는 “북한 주민들의 가슴과 마음에 파고든 16인치의 소프트 파워”라고 말 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미국의 시사해설자들은 잔인한 정권에 영합하는 것 같다고 공격하고 있다.

역사는 오케스트라 외교가 현실적 적절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보스턴 교향악단의 소련 방문은 곧바로 헝가리 봉기의 진압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중국과의 관계는 1973년 이후, 잘  되고 있으나, 소련과의 연대는 위험했다.  

미국은 평양 정권에 대하여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 이상의 전략적 이익은 갖지 않는다. 

요란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평양 정권의 주요 국영신문인 “로동신문”은 공연 뉴스를 하나의 하찮은 작은 기사로 넷째 페이지 하단에 실었다 (김 정일이 쿠바의 새 국가평의회의장 라울 카스트로에게 꽃다발을 보낸 이야기는 앞 페이지를 차지했다).

최소한, 공연의 효과는 단순한 문화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뉴욕 필은 무엇인가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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