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3일 월요일

統一論議 (52) 한반도 비무장지대 (DMZ)





한반도에는 6.25전쟁 정전협정으로 군사분계선 (MDL, Military Demarcation Line)이 그어지고, 이를 경계로 남북으로 2km씩 비무장지대 (DMZ, Demilitarized Zone)가 설정되었다.

이 비무장지대 (DMZ)는 임진강변에서 출발하여 동쪽 동해안에서 끝나는 폭 4km, 길이 248km (155마일)의 지상 (地上)의 띠다.  

6개의 큰 강과 평야를 횡단하며, 2개의 산맥을 타 넘어가는 동안 벌과 산기슭, 강 유역에 70개 마을을 가둬두고 있다.

임진강 하구의 정동에 있는 군사분계선 표지 제0001호에서 시작된 DMZ는 군사분계선의 마지막 표지 제1,292호의 동해안 동호리 까지 이른다.

휴전선 남쪽 5~20km 밖에는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는 민간인 통제선 (CCL, Civilian Control Line)이 그어져 있으며, DMZ 남방한계선과 민통선 사이의 구역을 민간인 통제구역이라 한다.

정전협정 (Armistice Agreement)은 유엔군과 공산군 (평양 정권과 중국)이 6.25전쟁의 중지를 합의한 협정이다.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개최한 이후, 159회의 본 회담과 179회의 분과위원회 회담 등 765회의 회담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板門店)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전쟁포로의 처리 문제 등 전문 5조 63항 부록11조 26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글과 영문,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미국의 저자이며 사학자인 페렌바크 (Theodore Reed Fehrenback)는 정전협정의 순간그의 저서This kind of War (어떤 전쟁)에서 ”이제 전쟁은 없다. 그러나 평화도, 승리도 없다. 이것이 휴전이다.“라고 묘사했다.

우리는 지구촌이 모든 대상에서 DMZ를 중심에 놓고 바라보는 이유를 알아야한다.  그것은 한 때 지구촌 25개국이 각축했던 세계사에 유례없는 전쟁터가 맺어 놓은 태생적 관계 때문일 것이다.

6.25전쟁에서 DMZ는 전쟁 당사국인 남과 북, 유엔군 측 참전 16개국, 의료 지원국 5개국 그리고 공산군 측에서 중국, 간접지원국인 소련의 참전으로 전쟁이 마무리되었던 지구촌 최대의 전쟁터였다.

6.25전쟁 3년간의 전쟁 피해는 한반도 남북한 지역을 막론하고 전국토가 폐허가 되었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내었다.  전투 병력의 손실은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 공산군 측에서는 인민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손실이 집계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렇듯 6.25전쟁은 지구촌 25개국 260만 명의 희생자 가족의 가슴 속에서 덜어낼 수 없는 전쟁이다. 

DMZ는 하나의 스토리이며, 6.25전쟁과 그 때 희생된 이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후 반세기 동안의 동서냉전 이데올로기의 대립 상황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냉전 다큐멘터리이다.

DMZ 스토리는 지구촌 25개국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DMZ는 지구촌 모두와도 통하는 네트워크다.

< 판문점 (板門店) >

6.25전쟁 당시 판문점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의 한촌 (寒村)인 널문리다.  원래 “널문리”는 옛날 어느 임금이 널문으로 만든 급조 (急造) 널문 다리로 강을 건너간 마을이란 유래에서 비롯되었다.

1951년 10월 25일, 이름 없는 이 한촌에서 휴전회담이 개막되면서, 세계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이 때, 중공군 측을 위한 널문리의 중국어 표기가 필요했다.

널문은 한자로 판문 (板門)이다. 마침 널문리에 담배 가게 (店)가 있어, 이곳을 板門店 (반먼디엔)이라고 불러 6.25전쟁에서 새로 지어진 지명이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공산군 간 정전협정이 이곳에서 조인되었고, 쌍방의 포로교환도 이루어졌다.  1970년대 이후 판문점은 남북 간 접촉 및 회담의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현재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하여 우리의 “자유의 집”과 “평화의 집”, 평양 정권의 “판문각”과 “통일각“ 등 10여 채의 건물이 들어 서있다.

< 공동경비구역 (JSA, Joint Security Area) >

정전협정 후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의 원만한 운영을 위해 1953년 10월 군사분계선 (MDL)상에 동서 800m, 남북 400m의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구역의 공동경비구역을 설정했다.

이에 따라 유엔 측과 평양 정권 측은 각각 35명씩의 병력을 배치, 공동경비임무를 수행해 왔으나, 1976년 8월 18일 평양 정권의 판문점 도끼 사건 후, 이 지역 내에 군사분계선을 표시하고 이를 경계로 양측이 각각 분할 경비를 맡게 되었다.  유엔 측의 경비업무는 2004년 10월 한국군이 완전히 인수했다.

< 전설적인 임진강 설마리 전투 >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는 서울 가는 나그네가 임진강을 건너면 처음 만나는 마을이다.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셔 (Gloucestershire) 대대 750명은 고랑포 축선인 이 설마리 235고지에서 중공군 3개 사단 2만 7,000명의 공격을 일곱 차례나 받고 대대는 전멸했다 (전사 50명, 포로 526명, 탈출 56명).

불운은 글로스터셔 대대뿐만 아니라, 영국군 29여단에게도 4만 2,000명의 중공군이 덮쳐 1,0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병력 수 10대 1의 비참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4일간의 이 끈질긴 저항은 서울을 살렸다.  그 전설적 전투가 설마리 전적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 (Forgotten War)일지 모른다.  그러나 참전국들은 6.25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런던의 선술집 “임진 퍼브 (Pub)에는 생존자 50여 명이 모이고, 일부는 해마다 4월이면 설마리 전적기념비를 찾는다.

임진강 전투에 참가한 글로스터셔 대대를 기념하기 위해 잉글랜드 남부 글로스터셔 인스워드 공군기지를 “임진 막사 (Imjin Barracks)로 개명했다.

호주는 육군사관학교 건물 이름을 “가평”이라 명명했으며, 프랑스는 “단장 (斷腸)의 능선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10월 개선문에서 “단장의 능선 행사”를 개최한다.

미국은 양평 지경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 (人海戰術)에 근접전투와 백병전 (白兵戰)으로 맞섰던 전투 사례를 육군의 전술 전기 (戰技)의 전투발전 요목으로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 (TRADOC, 미 육군교리사령부).

이토록 DMZ는 지구촌 어디와도 연결되고 공유하며 공감하는 소재로 네트워크 돼 있는 것이다.

< 철원평야에 묻힌 전설의 도시 “옛 철원” >

궁예왕 (弓裔王)이 세운 태봉국 (泰封國)의 궁예도성을 본 사람은 없다.  이어도 (離於島, Socotra Rock)처럼 전설의 섬일 뿐이다. 

성의 위치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이며, 추정되는 성축 시기는 903년~904년경이다.

궁예는 신라 52대 효공왕 (孝恭王)8년 (904년), 국호를 마진 (摩震, 911년 태봉으로 개칭)으로 나라를 세우고, 철원을 도읍으로 정하여 18년 간 통치했던 곳이다.  도성 터는 DMZ 내에 위치하며, 군사분계선이 그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일제 시대 일본은 철원을 계획도시로 건설하였고, 1914년 경원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되었다.

1945년 광복 후 38도선으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옛 철원은 북한 지역으로 넘어갔고, 6.25전쟁 후 수복하였으나 도시는 파괴되었다.

옛 철원의 관공서, 주요 건물들의 흔적은 민통선 내 논밭에서 벽돌과 기와 조각 등으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현재의 철원읍은 옛 철원이 아닌 새로 조성된 도시이다.

궁예도성과 DMZ의 기하학적 (幾何學的)만남은 참으로 흥미롭다.  한국의 통일 이상과 궁예가 세우려던 대동방국의 통일천하의 이상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궁예의 나라가 갖는 역사의 상징성은 독립과 건국, 분단에서 통일시대로 넘어갈 완충기로 상징되는 DMZ의 역사적 상황과 아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 자본주의 건축과 사회주의 건축 >

철원군 동송읍 한탄강에는 두개의 다리가 20여 미터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걸려있다.  

낮은 시멘트 난간의 오래된 다리는 1948년 평양 정권이 착공한 승일교이다. 오렌지색 철재 아치형 다리는 1996년 대한민국이 놓은 한탄대교이다. 

이곳은 본의 아니게 자본주의 건축과 사회주의 건축의 비교전시장이 돼버렸다.  승일교는 길이 120m의 철근콘크리트라멘조 소련식 유럽 공법 아치교로 1958년 준공됐다.  

6.25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전쟁 후 한국이 완공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합쳐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탄대교는 1999년 준공된 167m 중로식 로제 아치교 다리다.  승일교의 노후화로 이를 대체하기 위해 건설된 교량으로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교량 형식이 승일교와 대비된다.

한탄강에 남과 북이 합작 건설한 구조물인 다리가 있다는 설화 (說話)는 이제 사라진 것이다.  남북 합작이기는커녕 이 다리는 일본식 설계에 평양 정권이 착공하고, 미군이 교각을 
마저 세우고 한국군이 완성한 다국적 교량인 셈이다.

막연히 러시아 공법이라고 신기해하던 승일교이지만, 사실은 한때 크게 유행하던 건축 양식으로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발원지인 터키의 티그리스 (Tigris) 강 유역에 자리한 고대유적지의 아름다운 마을 하산케이프 (Hasankeyf)에는 승일교와 똑같은 디자인의 다리 유적이 남아있다.

< 소리 없는 물 전쟁 >

북한강 계곡에서는 20년 동안, 남과 북 간의 소리 없는 고독하고 치열한 물 전쟁이 치러졌다.  이 물 전쟁은 평양 정권이 먼저 싸움을 걸었다.  

1986년 10월, 평양 정권은 남방한계선인 북한강 오작교 북방 11km 지점인 강원도 창도군 임남리에 우리가 금강산댐이라고 부르는 “임남 언제 (堰堤)”를 착공했다.

이 프로젝트는 북한강에 5개의 댐, 임진강에 2개의 댐을 막아 두 강의 물을 저장 후 동해안으로 넘긴다는 것이다.  댐이 들어서는 곳은 조선조 초 땅이 독 속같이 편벽 (偏僻)하여 숨어살기 알맞다고 지목 됐던 땅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 댐인 “평화의 댐”이 1987년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수상리에 착공되어 2005년 10월, 높이 125m, 길이 601m, 저수용량 26억 3,000만 톤 석괴형 (石塊形)평화의 댐이 태어났다.

금강산댐은 높이 121.5m, 길이 710m, 저수량 26억 2,999만 톤이며, 2003년에 완공했다. 

2002년 위성사진을 통해 금강산댐이 큰 비에 붕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2005년 예고 없이 대량의 물이 방류되어 우리 지역이 피해를 입은 일이 있었다.

평화의 댐은 평양 정권의 수공 (水攻)에 대비하여 1단계 공사를 1989년에 완공하였고, 금강산댐 붕괴에 대비하여 2단계 증축공사를 2005년에 완공했다.

평상시에는 물을 가두지 않는 건류댐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금강산댐에 가둔 물을 모두 받아 담을 그릇이 마련된 셈이다.

< DMZ의 지뢰 >

민통선 넘어 임진강에서부터 볼 수 있는 빨간 역삼각형의 지뢰 표지판은 그 지점에 지뢰가 묻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지뢰는 냉혹한 무기이며, 또한 엄청난 번식력의 해충과도 같다.  “랜드 마인 모니터”는 20세기에 출현한 지뢰가 한 세기가 가기도 전, 87개국에 1억 1,000만 발이 매설되었으며, 2억 5,000만 발이 비축되고 있다는 보고를 내 놓았다. 

지구촌 인구 17명당 1발씩의 지뢰를 갖고 있다는 계산이다.  지뢰는 홍수가 난 강을 따라 DMZ를 벗어나 수 백리 여행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임진강, 한탄강, 차탄천, 대교천 등 DMZ의 강에서 해마다 수십 발, 많게는 수백 발의 유실 지뢰를 찾아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뢰 제거에도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경기도 파주시 민통선지역에서 송전탑 설치 공사 시, 불가피하게 지뢰 제거 작업을 벌릴 때, 약 28억 원의 지뢰 제거 비용을 투입하면서 겨우 13발의 지뢰를 수거했다. 

지뢰는 인간에게 톡톡히 몸값을 챙긴 셈이다. 지구촌 기생충 같은 이 지뢰는 DMZ 전역에 묻혀있다.  

나무뿌리 사이, 갈대밭 속, 바위 틈, 가랑잎 밑, 진달래꽃 그늘, 달래 넝쿨 속, 큰길가, 오솔길, 실개천, 모래밭, 심지어 옹달샘 가재 집에까지 숨어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DMZ는 미래를 위해 남겨 놓은 과거의 땅이다.  반세기를 우리와 함께 살아 온 DMZ는 머지않아 사라질 게 틀림없다.  

1970년대 들어 DMZ의 평화적 이용 정책안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1971년 6월, 유엔군 측 수석대표F. H. Rogers가 군사정전위원회 제317차 본회의에서 비무장지대의 비무장 지대화를 처음 제안했다.        

1982년에는 자유 관광 공동지역과 공동경기장 등 20개 시범실천사업을,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은 평화시 건설안을 유엔총회에서 제시했다. 

1999년 유네스코의 인간과 생물권 계획 (Man and the Biosphere Program, MAB)에 따른 “생물권 보전지역 (Biosphere Reserve, BR)지정 계획과 2004년 유네스코의 ”접경생물권보존지역 (Transfrontier Biosphere Reserve, TBR"과 함께 DMZ의 세계유산 (World Heritage) 지정 등록을 추진했으며, 통일부의 DMZ 평화생태 포럼 창설 등이 이어졌다.

DMZ 관광은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전망대, 전적기념관, 땅굴 등을 활용한 안보관광 등으로 발전돼 있으며, 최근 한국관광공사는 “전쟁에서 평화로, 죽음에서 생명으로”를 체험하는 PLZ (Peace & Life Zone, 평화 생명지대) 투어를 시작했다.

이 관광은 닫혀있던 땅, DMZ를 따라 숨겨진 생태계와 역사, 문화자원을 체험하고, 철책선 너머 북한 지역을 바라보며 평화를 기원하는 특별한 관광 패턴이란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반세기 넘게 그늘에 가렸던 DMZ 그 땅에 해가 뜨고 있다. 이제부터 바야흐로 한반도 DMZ의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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