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2일 일요일

평양의 빠삐용



--20세기 최고의 모험가로 알려진 양리 샤리에 (Henri Charriere)는 그의 놀라운 삶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과 영화 "빠삐용 (Papillon)"으로 유명하다. 

가슴에 새겨진 나비 문신으로 그는 빠삐용 (나비)으로 통했으며, 살인 누명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남미 프앙스령 기니아 감옥에 갇혔다.

빠삐용은 살아서 다시 나올 수 없다는 이 “악마의 섬”에서 탈출하여 자유의 갈망을 성취한 감동적인 실화 그 자체이다.

이 빠삐용이 한반도에서 평양 판 빠삐용으로 재현되었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평남 개천의 정치범 수용소에 복역하던 김 용 (金 龍,58)이 1998년 수용소 탈출과 탈북에 성공하여, 한국에 정착 후, 지금은 미국에서 목사로서, 인권운동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북한 지역의 정치범 수용소는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나누어 운용하며, 완전통제구역은 종신수용소로 다시는 사회로 나올 수 없는 곳이며, 대부분 그 안에서 죽는다.

혁명화구역에서는 1년~10년마다 심사 후 출소를 결정하며, 함남 요덕 수용소 (제15호 관리소)만이 위 두 구역을 운용하고 있다.

미국 외교정책연구소 (IFP)의 외교정책 초점 프로젝트는 Asia Chronicle에 기고한 논설에서 김 용의 사례를 들어 평양 집단에 대한 환상을 경고한다. --



    

김 용(金 龍)은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유형지 “악마의 섬”의 평양 판 완전통제구역 제 14호 관리소를 탈출하는 재주를 보였다.

그는 이루 다 말 할 수 없는 비참한 환경의 지하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해 왔다.  하지만, 빠삐용처럼, 탈출에 성공하여 그의 실화를 말하고 있다.

영문판 “집으로 가는 먼 길 (Long Road Home)"이 곧 출간 된다 (컬럼비아대학 출판부, 2009).

김용은 빠삐용처럼 억울한 누명을 쓴 무구 (無垢)한 사람이다.  심문과 선고 판결 이전, 그는 평양의 최고 엘리트의 한 사람으로서, 송이버섯과 해물을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드린 국가보위부 중좌 출신의 간부였다.

자신의 과거를 찾아 나설 때, 그의 파멸의 원인이 될 숨겨진 비밀을 발견했다.  김일성의 6.25전쟁의 고아를 돌보라는 지침에 따라, 한 고위 급 간부 부부의 양자가 된 그는 북한 지역에서는 호사스럽게 지내는 것으로 통하면서 성장했다.

그 가정에는 풍부한 식량과 많은 장난감, 옷가지 등 없는 것이 없고, 늘 부유층의 손님들로 들끓었다.  손님들은 빈손으로는 오지 않고, 사탕과 용돈과 여러 가지 물건을 갖고 와서는 자녀의 승진과 친척의 백화점 취직 등을 양부모에게 부탁하곤 했다.

호의와 뇌물로 정교하게 조율된 이 사회 제도는 김 용의 구제와 파멸의 원인이 된다.

열성분자 김 용은 혁명학원에 들어갔으며, 공부보다는 유도를 더 잘했다.  그는 운동 기량 덕분에 군 유도 팀에서 빨리 승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한 숙명적인 태생의 호기심을 갖게 되면서, 드디어 생모를 밝혀내고 마침내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들었다.

평양 정권은 6.25전쟁 이후 그의 아버지를 이적행위의 죄과를 들어 처형했다.  이 일로 가족 전체가 혐의자로 지목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대를 이을 죄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기위해 어린 자식을 고아원에 보낼 가슴이 찢어지는 선책을 했다.

삼촌과 어머니는 김 용의 태생을 감지할 수 없도록 최선을 다했으나, 얄궂게도 특별 승진을 위한 일상적 배후조사과정에서 보위부는 그의 정보를 찾아냈다.

김 용은 완전히 세뇌된 엘리트로서 군복무도 충실히 했으며, 김일성에게는 많은 외화를 수출 수입으로 바쳤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의 죄는 그의 죄였다. 그는 체포되어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그가 자백했다면, 그는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결백함을 굽히지 않았다. 김 용은 평생을 갇혀 살 “완전통제구역” 제14호 관리소에 송치되었다.

관리소는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다.  한줌의 삶은 옥수수 낟알을 먹고 하루 12시간을 넘는 혹독한 강제 노동에 내몰린다.

김 용은 “산송장”이 되었다.  자살 시도는 실패했고, 수용소 탈출을 꿈꿨다. 그러나 탈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구타와 처형도 목격했다.  살기위해 쥐와 메뚜기 등 무엇이든지 먹었다.

김 용의 판결은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최악의 대기근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 이 속에서 그의 삶에 대한집념은 더욱 돋보인다.

운 좋게 인근의 제18호 관리소에 옮겨지면서 수용소 생활에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다. 그곳에서의 노동 시간은 약간 짧아졌으며, 그의 생모와 재회했다.

먹을 것 찾아다니기도 좀 쉬어졌으며, 그의 어머니는 배식된 자기 몫을 그를 위해 따로 떼어두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석탄 차 밑 부분의 뜻밖의 숨은 곳을 발견했다.  그는 간신히 그 틈으로 쑤셔 들어 갈 수 있었으며, 석탄 덩어리의 뚜껑이 닫히지 않도록 버티면서 위에 실릴 무게를 견딜 수 있었다.

김 용은 일종의 관 속에 실려 제18호 관리소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의 평양 정권에 관한 지식과 많은 연고 관계의 사람들 그리고 생애에 쌓아 온 재치 있는 솜씨의 발휘는 일단 수용소 밖에서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탈북 하여 몽골을 거쳐 한국에 안전하게 올 수 있기 까지 많은 사람의,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김 용은 빠삐용처럼, 여러 탈출을 일삼아야했다.  그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고통을 견뎌냈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에 다시 정착하여, 그의 이야기를 다시 말 하며 평양 정권의 인권 비리를 규탄하고 있다.

김 용의 실화는 평양 정권의 야만적 행위를 생각나게 한다.  “악마의 섬”에서처럼,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전혀 다르게 일어나는 이 모든 잔학 행위 역시 평양 정권의 야만적 행위의 암시이다.

여러 판단에도, 북한 인구의 1%에 가까운 주민들이 이런 수용소에서 노역에 내몰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대략 인구의 1%가 옥에 갇혀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법을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다.

물론, 미국과 평양 정권의 사정과 형법은 다르다.  하지만 평양 정권은 전체 인구가 징역형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놓였던 폴 포트 (1923~1998)치하의 캄보디아가 아니다.  불의를 정의인양 모른체하는 보통 사람들의 자질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평양 정권에 관여하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김 용의 실화와 같은 이야기를 감수해야한다.  

평양 정권에 대한 환상은 금물이다.   달리 어떠한 가능성 있는 대안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평양 정권에 정치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지지한다.

자유세계는 인도주의적 원조와 투자를 통하여 대다수의 북한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평양 집단에 대한 제재와 더 이상 고립시키는 것은 평양의 강경노선정책을 고무할 뿐이다.

최상의 대북 정책의 시험은 수용소의 공포와 정치적 개입의 책무라는 대립적인 두 생각을 갖는 능력이다.  그러면서 여전히 어떤 구실도 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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