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2일 일요일

잊혀진 6.25전쟁의 핵 위협


 

     -- 노티러스 연구소 정책 포럼은 2005년 1월 11일, 시카고 대학교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6.25전쟁의 핵무기 사용 논의에 관한 역사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  미국의 수도 소재 국립기록보관소의 방대한 자료는 세계적으로 “잊혀지고, 알려지지 않은 6.25전쟁”에서 당시 미국은 450개의 핵무기 (원폭) 가운데 30개 정도의 핵무기의 사용과 황해와 동해를 잇는 한반도 북쪽 지역을 코발트 방사능 지대로 만들어, 한반도에서 적어도 60년 동안, 육지를 통한 남침을 저지한다는 전략 구상의 자료도 보여 주고 있다. --
 
*6.25전쟁 당시. 미국은 450개, 소련은 25개의 원자 폭탄을 보유함으로써, 미국은 소련을 걱정하지 않았음.
 
      



1950년~53년의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고,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낫다.  6.25전쟁에서 지을 수 없는 사실은 평양 정권에 대한 미국의 공중 타격의 엄청난 파괴력이다.

이 파괴력은 광범하고 계속적인 소이탄 (燒夷彈) (주로 네이팜)의 사용으로부터 핵과 화학 무기의 사용 및 전쟁 막바지에 북한 지역의 거대한 댐을 폭파하는 위협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것이었다.

지금도, 이 한 토막의 이야기는 일반 시민은 말 할 것도 없고, 지난 10년간의 매스컴의 북 핵 문제의  분석에서도 언급되지 않았으며, 역사 학자들에게 조차도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6.25전쟁은 또한 국지전으로 당연시되고 있다.  그러나 전쟁 수행 자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공중전과 같은 강력한 유사성을 띠고 있었으며, 대체로 같은 미국 군사 지도자들이 지휘하였다.

히로시마 (廣島)와 나가사끼 (長崎)에 대한 원폭 공격은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되었다.  그런데도, 일본과 한반도의 도시에 대한 소이 공격 (燒夷 攻擊)은 별로 주의를 끌지 않았다.

6.25전쟁 이후의 미 공군과 동북아의 핵전략은 별반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런 사실이 평양 정권의 선택을 극적으로 결정짓도록 하여, 그들의 안보 전략의 근본 요인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네이팜 (Napalm)탄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발명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상처 입은 민간인들의 처참한 사진의 돌출로 네이팜탄은 주요 현안이 되었다.

한반도의 평양 정권은 북 베트남 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붐비는 도시와 공업 시설을 갖고 있었음으로 더욱 지독한 효과와 함께 더 많은 네이팜탄이 투하되었다.

2003년, 국제 학술회의의 네이팜탄에 관한 토의에서 장진호 전투 시 한 눈을 잃은 6.25전쟁 참전 미군 생존자는 네이팜탄은 “바로 사람 위에 떨어지는 위험한 무기” 라고 술회하였다. (아군을 뜻하는 “바로 사람 위” 란 수많은 미군을 말 하는 것임).

네이팜은 피부를 파삭 파삭하게 태웠으며, 감자튀김처럼 얼굴, 팔다리로부터 깝질을 벗길 수 있었다.  뉴욕 타임스의 조지 바레뜨는 한국의 안양 (安養) 인근에서 “현대전의 섬뜩한 찬미 현장”을 목격했다.

마을과 들녘 전체의 주민들은 네이팜 타격을 받아 몰살되었으며, 자전거를 타려고 하던 남자와 고아원에서 놀음놀이를 하던 50명의 남녀 어린이 그리고 책장을 넘기던 한 주부는 죽는 순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이런 “충격적인 보고”는 검열 기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립기록보관소에서 발견된 맨 처음의 마을과 소도시의 소각 명령 대상은 1950년 8월, 격렬했던 부산 주변 낙동강 전투에서 미군들이 지역 내의 수천 명의 게릴라 공격으로 고통을 받았던 한국의 먼 동남부 지방이었다.

8월 6일, 미군은 청송, 진보 그리고 구수 동에 대한 소각을 공군에 요청했다.  B-29 전략 폭격기도 전술적 폭격에 가담하도록 했다.  8월 16일, B-29 5개 대대는 전선 인근의 많은 소도시와 마을이 있는 장방형 구역을 수백 톤의 네이팜탄으로 타격하여 불바다를 만들었다.

8월 20일의 폭격에 이어, 8월 26일에도 11개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조종사들은 민간인들을 피하면서 표적을 폭격하도록 지시를 받았으나, 종종 레이더에 의한 인구 밀집 지역을 폭격하거나, 주 표적이 여의치 않을 때는 부 표적에 엄청난 분량의 네이팜탄을 퍼붓기도 하였다.

1950년 7월 31일, 공업 도시 흥남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에는 500톤의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화염이 100m 까지 솟구쳤다.  8월 12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250대의 B-17 1개 기단이 투하할 수 있는 총톤수인 625톤의 폭탄을 북한 지역에 투하했다.

8월 말에는 B-29 편대가 하루에 대부분이 네이팜인 800톤의 폭탄을 투하했으며, 1950년 6월부터 10월 말 까지, B-29기는 866,914 갤런의 네이팜을 퍼부었다.

공군 당국은 이 신 무기를 즐기고 있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의 항의를 놀려대고, 그들의 “정밀 폭격”에 관해 신문을 속였다.  공군은 전단(傳單) 광고로 민간인들의 폭탄 접근을 경고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종사들은 이런 것들은 쓸모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이 전쟁에 가담한 후 북한 지역의 대부분의 마을과 소도시를 말살하려는 서곡일 뿐이다.

< 중국의 6.25전쟁 개입 >

중국의 개입은 즉각적인 공중 공격규모의 단계적 확대를 불러왔다.  1950년 11월부터 맥아더 장군은 전선과 중국 국경 간  수 천 평방 마일의 북한 지역에 “모든 통신 수단과 시설, 공장, 도시와 마을”을 공중 공격으로 파괴하여 불모지를 만들 것을 명령했다.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에 정통한 한 영국 무관은 소련에 가까운 라진 (羅津 )과 압록강 댐 두 곳은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제외되었음을 확인했다.

이 파괴는 만주 (중국 동북부) 국경에서 시작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1950년 11월 8일, 79대의 B-29기는 550톤의 소이탄을 신의주에 투하했으며, 이 도시를 지도에서 없애버렸다.

1950년 11월 8일자 맥아더 기록 문서에는 “11월 25일 까지 압록강과 남방 적전선 사이의 서북방의 대부분의 지역은 불타고 초토화된 황무지가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중. 북의 대 공세에 의해 유엔군의 북한 북부 지역을 탈환하기에 앞서 일어났다.  미 공군은 500파운드 폭탄 700개를 평양에 투하했으며, 무스탕 전투기도 175톤의 지연신관 폭발물을  투하했다.

이 폭발물은 땅에 탁 하고 부딪치고, 사람들이 네이팜 화염으로부터 사상자를 구출하려 할 때 폭발한다.

1월 초,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또 다시 공군에게 “소이 폭탄으로 도시를 초토화하라”는 평양 폭격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1월 3일과 5일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미군이 38선 남쪽으로 퇴각함에 따라 “불길 초토화 방침”은 계속되어 의정부, 원주 그리고 적이 접근하는 남쪽 여러 소도시를 차례로 화공 (火攻)했다.

공군은 또한 평양 지도부의 섬멸을 시도했다.  2003년의 이라크 전쟁에서 세계는 TNT 8,5톤의 폭발력을 가진 무게 10톤의 “모든 폭탄의 어머니” 로 불리는 “MOAB"를 알게 되었다.
뉴스위크지 (2003년 3월 24일)는 이 폭탄을 그 표지에 올리면서 “왜 미국은 세계에 겁주나” 의 표제를 썼다.

1950년~51년의 절망적인 겨울에 김일성과 그의 측근들은 1930년대 그들이 처음 출발했던 만주 (중국 동북부) 국경 인근의 강계 (江界)의 깊은 땅굴 속에 숨었다.  인천 상륙 이후 3개월 동안, 이들을 찾는데 실패하면서 B-29기는 강계에 타잔 폭탄을 투하했다.  이 타잔 폭탄은 6톤의 큰 폭탄으로 일찍 사용된 일이 없었으며, 궁극 무기인 원자 폭탄에 비유된다.

(김일성 일당들의 중국 도주를 가정하여 평양에서 중국으로 잇는 옛 중국. 조선 간 행상 통로를 융단 폭격했지만 이것은 정보의 실패작이었다).

< 봉쇄를 위한 강타 >

전쟁 2주 째인 1950년 7월 9일,  맥아더가 리지웨이에게 보낸 화제의 메시지는 합참의장에게 “원자 폭탄 사용 여부의 고려”를 촉구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기억해 둘만한 일이다.

작전부장 찰스 볼테는 맥아더와의 통화에서 “지상 전투의 직접지원”을 위한 원자 폭탄의 사용 문제를 논의했다.  볼테는 미국의 세계전쟁의 능력을 크게 훼손함이 없이, 10~20개의 원자 폭탄을 한국 전쟁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볼테는 일찍 맥아더로부터 원자 무기의 전술적 사용 건의를 받았으며, 북한 지역을 점령하여 중국이나 소련의 잠재적 개입을 조종하는 것을 포함한 비범한 전쟁 야망의 암시도 받았다.

맥아더가 피력한 속마음은 이렇다.  “나는 적을 북한 지역에서 저지할 것이다.  나는 적에게 막다른 골목을 보여 주겠다.  만주와 블라디보스독 으로부터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에는 수많은 교량과 터널이 있다.  여기에 6개월의 복구공사가 소요되는 강력한 타격을 가하기 위해 유일무이한 원자 폭탄을 사용해야 한다. 나의 B-29기에게 아첨해야 하겠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합동참모본부는 원자 폭탄을 사용할 만큼 표적이 크지 않고, 히로시마 이후 5년 동안의 세계 여론에 관한 걱정과 재래식 군사력으로도 능히 전세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 등 이유로 원자 폭탄의 사용을 기각했다.  그러나 1950년 10월과 11월, 대규모 중공군의 개입으로 이 계산은 바뀌었다.

11월 30일에 있었던 유명한 기자회견에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은 어떠한 무기라도 쓸 수 있다고 말 하면서 원자 폭탄 사용의 위협을 비쳤다.  이 위협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실책이 아니고, 원자 폭탄을 사용하는 긴급대책에 근거한 것이었다.

같은 날, 공군의 조지 스트래트메이어 장군은 전략공군사령부의 호이트 밴덴버그 장군에게 “지체 없이 중(中) 폭격 대대를 극동에 급파할 준비를 할 것이며, 원자 폭탄도 포함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합동참모본부가 “공산 중국에 대한 전면적 원자 군사행동”의 국면을 제외하고는 한반도에서 원자 폭탄은 유용하지 않다고 일찍 결론짓고 있었음을 정확히 상기시켰다.

그러나 이 명령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바뀌었다면 르메이는 그의 사령부만이 경험과 기술 훈련 그리고 원자 폭탄 투발 방법의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스트래트 메이어에게 말 했을 것이다.  1945년 도쿄의 소이(燒夷) 공격을 지시했던 그가 또 다시 극동에 그 공격을 가할 준비에 착수했을 것이다.

워싱턴은 미국이 최소한 450개의 원자 폭탄을 갖고 있고, 소련은 단지 25개뿐이기 때문에 소련의 원자 무기의 응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12월 9일, 맥아더는 6.25전쟁에서 사령관의 재량으로 원자 폭탄을 사용하기를 원한다고 말 했다.  12월 24일, 그는 26개의 원자 폭탄이 소요되는 “저지 (沮止) 표적 목록”을 제출했다.

그는 또한 “침공군”에게 4개를 투하하고, 추가로 4개를 “적 공군의 주요 집결”에 투하하기를 원했다.

그의 사후 (死後)에 발간된 인터뷰 기사에서 맥아더는 “10일 승전 (勝戰) 계획”을 갖고 있었으며, “만주의 목을 꿰질러 30개 정도의 원자 폭탄을 투하” 하는 계획도 밝혔다.

그리고 그는 50만 명의 중국 국부군 (國府軍)을 압록강에 투입하고, “동해로부터 황해에 이르는 한반도 북 쪽 지역을 60년~120년 동안 방사능이 지속되는 방사능 지대로 펼쳐 놓으면 적어도 60년 동안은 한반도의 북 쪽 으로부터는 육지침공은 없을 것이다.” 라는 전략 구상도 밝혔다.

맥아더는 이 극단적인 전략에는 소련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며, “나의 계획은 확실하다” 고 확신했다.

< 두 번째의 요구 >

코발트 60은 라듐보다 320배나 더 강력한 방사능을 갖고 있다.  한 발의 400톤 코발트 수소폭탄은 지구상의 모든 동물을 없앨 수 있다고 역사 학자 카롤 퀴글리는 말 한다.  맥아더는 전쟁 미치광이처럼 비치지만, 그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중. 북 대 공세 이전에 합동참모본부의 위원회는 원자 폭탄은 한반도에 진군하는 중공군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으며, 초기에 한반도의 국경선 바로 북쪽 만주 지역에 유엔에 의해 설정될 수 있는 저지선에서 유용할 것이라고 말 했다.

몇 개월 후에 상원 의원 앨버트 고 (200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앨 고의 아버지. 끝까지 버틴 베트남 전쟁의 강력한 반대자) 는 “한반도는 미국 남자의 고기 저미는 기계가 되어 가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한반도를 영구히 두개로 분할할 방사능 벨트 설치 같은 “지각 (地殼) 변동” 방법으로 전쟁을 끝낼 것을 제안했다.

리지웨이는 코발트 폭탄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안했지만, 1951년 5월, 맥아더의 후임으로 주한 미군사령관이 된 후 12월 24일의 맥아더의 요구를 새롭게 하여, 이번에는 38개의 원자 폭탄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승인되지 않았다.

1951년 4월,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 했을 때, 미국은 자칫 원자 폭탄을 사용할 뻔 했다.  이 일화에는 많은 비밀이 얽혀 있지만, 현재로서는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한 것은 그의 거듭된 불순종 때문이 아니라, 워싱턴이 핵무기 사용을 결정할 현장에 신뢰할 수 있는 지휘관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분명해 졌다.  트루먼은 그의 원자 폭탄 정책 때문에 맥아더를 버렸다.

1951년 3월 10일, 맥아더는 중공군이 국경 지역에 새로운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고, 소련이 만주의 공군 기지에 200대의 폭격기를 투입한 이후 (이 기지에서 소련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내 미군 기지도 타격할 수 있다) 한국 전쟁에서 계속 제공권을 유지하기 위한 “D 일 원자 폭탄 능력”을 요구했다.

3월 말, 스트래트메이어는 오끼나와의 가데나 공군 기지의 원자 폭탄 장전 갱 (裝塡 坑)은 작동하고 있으며, 폭탄은 결합하지 않고 기지에 운송되어 단지 주요 부품만 없는 상태라는 보고를 했다.

4월 5일, 합동참모본부는 중공군의 대규모의 새로운 부대가 전투에 투입되거나, 폭격기가 미군 공격을 위해 발진할 경우, 만주의 기지에 대한 즉각적 원자 보복 공격을 할 것을 명령했다.

그날, 원자 에너지 위원회의 골돈 딘 위원장은 9개의 마크 IV 핵 캡슐을 원자무기의 지정 운송부대인 공군 제9 폭격 대대에 이양했다.

1951년 6월, 합동참모본부는 이번에는 전술적 전장 환경에서의 핵무기 사용을 다시 검토했다.  그리고 전쟁이 1953년까지 계속됨에 따라 여러 가지 많은 제안들이 나왔다.

맨하탄 프로젝트 (The Manhattan Project) 의 의장을 지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의 전술적 사용의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한 프로젝트 비스타 (Project Vista) 에 합류했다.

1951년, 미 국방부의 비밀 지령을 받은 젊은 사무엘 코헨은 서울 재탈환 전투를 관전하면서, 도시를 파괴함이 없이 적을 섬멸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중성자탄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6.25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핵 프로젝트는 허드슨 항 작전 (Operation Hudson Harbour) 이었다.  이 계획은 “6.25전쟁에서 오늘날의 대량 살상무기 (WMD)의 뜻을 지닌 신기한 무기의 사용 가능성을 위한 중앙정보국의 비밀이용과 국방부의 공개이용”을 포함하는 대규모 계획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다. 

< 국지전 >

이와 같은 “신기한 무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네이팜은 대단히 새로운 무기였으며, 공중전은 평양 정권을 때려 눕혔고, 엄청난 민간인들을 살상했다.  북한 주민들은 3년 동안, 매일 네이팜으로 불타는 위협을 받았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52년 까지, 한반도의 중북부 지역의 모든 것을 쓰러뜨렸으며, 남은 것은 땅굴 속의 생존자뿐이었다.

전쟁 기간, 미 공군은 북한 전역을 무섭게 파괴했다.  휴전에 즈음한 폭격 피해 평가는 22개 주요도시 가운데 18개 도시의 절반은 폐허가 되었음을 드러냈다.  도시의 파괴 상태는 공업 도시 흥남과 함흥은 80%~85%, 사리원은 95%, 신 안주는 100%, 진 남포항은 80%, 평양은 75% 로 나타났다.

영국의 한 보고서는 파괴된 수 천 개의 한 마을을 “보라 빛 재의 넓고 낮은 흙무덤” 으로 묘사했다.  1950년 7월, 대전 전투에서 생포되어 북으로 갔던 윌리암 딘 장군은 후일에 그가 본 북쪽의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은 바로 “자갈밭이나 눈으로 덮인 개활지”였다고 술회했다.

전쟁 말기에 윈스턴 처칠조차 네이팜을 발명했을 때 누구도 네이팜이 모든 민간 주민들을 튀기게 하리라고 상상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이것이 6.25전쟁이었고, 6.25전쟁은 국지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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