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3일 월요일

Nuclear Free World


      

-- 냉전시기, 미국을 핵 강국으로 이끌었던 미국 스탠퍼드 그룹의 전 국무장관 조지 슐츠, 전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 그리고 제임스 굿비는 Helsingin Sanomat(핀란드 최대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Nuclear Free World, 핵무기 없는 세상”을 추구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인터뷰는 앤 란티 주 핀란드 미국대사가 정리했다. --



이것은 대규모 핵전쟁 시나리오였다.  소련은 핵 유도탄 공격을 감행했고, 미국은 인구의 75%까지 잃었다.  미국의 산업은 70%가 파괴되었다.

미국 대통령은 파괴 규모의 즉각적 데이터도 갖고 있지 않았다.  대통령에게는 세 가지 선택권이 있다.  첫째는 소련과 그 동맹국 그리고 중국에 대한 전면 핵 보복이다

둘째 선택은 군사 및 산업 표적에 대한 제한적인 선제 무력분쇄공격이다.  셋째는 위 가운데 하나이며, 소련에만 한한 것이다.

대통령은 소련의 도시를 포함한 대규모 반격인 제2의 선택을 택한다.  미국 대통령은 소련이 서유럽을 보복 공격하여 파괴하는 것을 알지만, 미국의 국익은 서유럽의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을 최대한 파괴하는 결정을 하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1963년에 만들어졌다.  미 국무부와 정보부 그리고 군부의 요원으로 구성된  그룹이 소련과의 핵전쟁의 처리와 종결 시나리오의 기안을 맡았다.

이 그룹은 세 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어 냈는데 모두 끔찍한 것이다. 한 때 극비 문서였던 이 문서는 현재 공공 영역 (Public domain)으로 되어있다.

“핵전쟁의 처리 구상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 것은 캘리포니아 스탠퍼드의 제임스 굿비 (80)의 말이다.  누구라도, 제임스 굿비는 국무부의 젊은 관리로서, 대부분의 문서는 그가 작성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굿비는 군축에서 자기 경력을 쌓았으며, 핀란드에서는 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1980년~81년 주 핀란드 미국대사로 근무했다.

오늘날, 그는 더는 핵전쟁 시나리오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거의 동등하게 놀랄 무언가를 하고 있으며, 핵무기 없는 세상을 곰곰 생각하고 있다.

굿비는 혼자가 아니다.  스탠퍼드 그룹은 미국 글로벌정책 공식화의 주역인 이전의 스타들에 의해 앞장서고 있다.

이들은 미국의 핵 억지력의 개발을 책임졌으며, 전 국무장관 조지 슐츠 (89), 전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 (82) 그리고 영향력이 큰 핵물리학자 시드니 드렐 (83)이다.

오늘날 이들 모두 글로벌 핵무기 제거를 요구하고 있다.  수년전, 핵 없는 세상 (Nuclear 
free world)의 이야기는 위험한 환상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세계의 모두 23,000개의 핵탄두는 확실히 쉽게 없어지지 않겠지만, 큰 변화는 현재 진행되고 있다.  

핵 없는 세상의 추구는 이미 정책 집행의 한 부분이 되었다.  바로 지금, 매 5년마다 열리는 핵 군축이 유엔의 NPT (핵 확산방지조약) 검토회의에서 논의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년 전, 그의 장기적 목표인 핵 없는 세상 (Nuclear free world)을 발표하면서, 핵군축에 전향적 조처가 나왔다.  

오바마는 지난 봄 프라하 (체코공화국의 수도)에서 “핵 강국으로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사용했던 핵 강국으로서, 미국은 행동의 도덕적 책임이 있다.  우리의 혼자 힘으로는 이 시도가 성공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말 했다.

러시아조차 이 목적을 지지하고 있다.  금년, 미국과 러시아는 몇 년 만에 처음 핵무기 삭감에 합의했다. 스탠퍼드의 원로들은 오바마에 앞서 몇 년 전 핵 없는 세상을 촉진하기 시작했다.  

2007년 1월, 슐츠와 페리, 헨리 키신저 (86) 그리고 경력을 오로지 군축에만 받쳤던 전 상원의원 샘 넌 (71)은 월 스트리트 저널에 기사를 발표했다.  

이 기사가 그 캠페인의 시작을 표시했다.  그때부터, 슐츠와 페리는 은거할 의사도 없이 핵 없는 세상을 촉진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왜 그들은 이와 같이 마음을 바꿨을까 ?  그들은 확실히 그들의 초기의 소행을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최근 스탠퍼드에서 핀란드 최대 신문사인 헬싱키 신문사 (Helsingin Sanomat)의 보도자가 그들을 만남으로써 분명해졌다.

페리는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냉전 기간에 내가 한 것은 올바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한다.  페리는 미국의 핵 세력을 증강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0년대 말, 나는 연구개발 담당 국방차관으로서 트라이던트 잠수함의 유도탄 실험용 유도탄(MX-missile), B2 폭격기 그리고 공중발사순항유도탄 (ALCM, Air Launched Cruise Missile) 개발의 책임을 맡았다.

나는 이 무기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페리는 냉전이 끝날 때, 이미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국방장관으로서, 약 8,000개의 핵탄두의 제거에 앞장섰다.

스탠퍼드 팀에는 최초 핵 없는 세상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조지 슐츠는 분명히 다른 사람보다 앞장섰다.  히로시마 (廣島)폭격의 핵 시대의 시작은, 슐츠 에게는 착잡한 충격이었다. 

“나는 태평양 전선에서 2년 반의 해병대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미국행 병력수송선에서  원자폭탄인가 무언가 하는 것이 투하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배가 샌디에이고에 도착했을 때, 다른 폭탄이 나가사키 (長崎)에 투하되었다.  미국의 대 일본전은 끝났고, 슐츠와 기타는 일본의 점령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다행이었다.

몇 년 후,  슐츠의 경력은 경제학과 대기업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무언가 사악한” 히로시마의 파괴의 사진은 그의 곁에 있었다.

이 이미지는 군비경쟁에 종지부를 찍지 않았다.  특히 1949년 소련의 첫 핵폭탄 시험 후, 이 소용돌이는 가속화했다.

나중의 발명품인 수소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면, 파괴는 1,000배나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브라보 (Bravo)핵폭탄 종류의 폭탄이다.

브라보는 1954년 3월 1일, 비키니 환초 (環礁)에 터뜨려졌으며, 미국이 시험한 가장 큰 15메가톤 위력의 핵폭탄이다.

이 시험에 관한 소식은 전 세계에 퍼졌다.  시험장 밖에 있어야했던 일본 어선이 낙진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원자력기구 (Atomic Energy Agency)에 근무하던 제임스 굿비는 그 배가 위험지대 내에 있었는지 조사하게 되었다.

굿비는 “이것은 과학적인 계산 착오이다. 그 배는 분명히 위험지대 내에 있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라고 말 했다.

그 사건은 굿비의 핵무기 소신에 관해 교훈적이었다.  “어떻게 나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을까 ? 아니다.”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슐츠는 핵무기를 사용하는 상황이 이치에 닿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국방부장관으로서 페리는 대통령에게 핵무기 사용을 건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도 그렇게 믿지 않았다.  

소련의 핵무기 역사를 전공한 스탠퍼드 그룹의 사학자 데이비드 홀로웨이는  소련이 1962년 쿠바에 유도탄을 보냈을 때, 세계는 핵전쟁 직전이라 믿었으나 실제 사용할 준비는 안 되었다고 말 한다.

소련이 쿠바에서 유도탄을 철수한 후,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각료회의에서 그는 소련을 전쟁으로 끌고 갈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 했다.

보기에 피델 카스트로만 유독 그 극한 상황을 몰랐다.  그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면 소련은 완전히 핵무기를 배치하라고 끝까지 요구했다.  소련은 이 요구에 당혹했다.

흐루시초프는 1964년 사임을 강요당했다.  아유를 설명하는 연설은 결코 발표되지 않았다.

홀로웨이는 흐루시초프가 세계를 세 번 핵전쟁 직전까지 몰고 간 비난을 받았다고 말 한다.
1956년 수에즈 위기, 1961년 베를린 위기 그리고 1962년 쿠바에서였다.

비록 핵전쟁은 문제가 안 된다고 결정되었지만, 초강대국들은 그들의 핵병기의 제거에는 착수하지 않았다.  그러하기는커녕, 어리석은 군비경쟁이 1970년대에 시작되었다.

공포의 균형 (A balance of terror)이 나타났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 파괴할 수 있는 충분한 무기를 확실히 보유하게 되었다.

동시에, 핵무기 보유국의 수가 늘었다.  제임스 굿비는 1970년대를 모든 종류의 무기와 너무 많은 무기가 있었던 핵 억지력의 “로코코시대 (Rococco period)"라고 불렀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면서 중요한 전환점이 도래했다.  레이건은 그의 임기 8년 동안 유럽의 많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비웃음은 레이건이 “핵무기 없는 (Without nuclear weapons)” 세상을 제창하면서 더 크게 성장했다.

그 당시, 그 구상은 심각하게 논의되었고, 레이건이 여러 번 들고 나왔지만, 다른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의 고문들은 모두 현실로 되돌아가자고 말 했다.  조지 슐츠는 “나 말고 그것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 한다.

슐츠는 1982년부터 레이건의 힘 있는 국무장관을 지냈다.  레이건의 재임기간, 미국은 신무기를 늘리는 것과 소련과 핵무기의 수를 줄이는 협상을 둘 다 했다.

슐츠는 1984년 짧은 기간 소련을 이끌었던 콘스탄틴 체르넨코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말 한다.  그 편지는 새 군비철폐회담이 계획된 직전에 쓴 것이며, 레이건의 핵무기 없는 세상의 구상을 지지한고 했다.

미국과 소련의 관리들은 공히 그 목적을 위한 논의를 방해했다.  “군축 관리들은 그 구상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공식 제안이 되지 못했다.”고 슐츠는 말 한다.

하지만, 회담은 진척했으며, 1986년 레이크야비크 (Reykjavik, 아이슬란드의 수도)에서 레이건과 소련의 새 지도자 미카일 고르바초프와의 정상회담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레이크야비크 정상회담은 중거리 핵무기의 제거와 전략핵무기의 반감 (半減) 합의의 기초를 제공했다.  이것은 실로 역사적 업적이었다.

그러나 이 정상회담은 왜 세계의 모든 핵무기 제거의 합의를 타결하지 못했을까 ?

슐츠는 설명한다.  “레이건은 그곳에서 이틀 동안, 고르바초프를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그 방의 유일한 국외자였다.”  그는 유일한 국외자가 아니었다.   노트테이커 (Note taker, 기록자) 역시 거기에 있었다.

회의록은, 레이건이 둘째 날 마지막에 “모든 핵무기 제거”는 좋다고 말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파괴할 수 있다.”고 답했다.
“자 합시다.” 슐츠는 말 했다.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의 우주기지의 별들의 전쟁무기체계에 관한 논쟁이 그 구상을 무력화했다. 

핵 없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조차 있었다는 소문은 두 지도자의 본국과 세계에 놀라움을 일으켰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는 그 구상에 분명히 반대하면서, 슐츠에게 핸드백으로 한방 먹였다 (Gave Shultz the hand-bag treatment)."고 익살맞게 표현 했다.

세상은 공포의 균형 밑에서 사는데 너무 익숙해졌다. 아무도 그것을 꺾으려하지 않았다.  이 현안은 20년 뒤 까지도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2006년, 슐츠와 페리 그리고 드렐은 놀라운 레이크야비크 정상회담의 논의가 세계에서 극적으로 변한 중요성으로 미루어, 스탠퍼드에 협의회를 세웠다.

핵무기 없는 세상의 구상이 부활했다.  세미나 뒤에 슐츠와 페리는 키신저와 넌과 함께 그들의 의견을 발표했다.  “그것이 이 운동의 시작이었다.”고 페리는 말 한다.

오늘날, 슐츠와 페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로비와 외교 활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과 함께 핵병기를 삭감하기 위해 러시아를 설득할 새로운 기사를 준비하고 있다.

굿비는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비핵억지력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것은 핵무기를 제거하기위한 시나리오이다.

우선, 강대국들이 그들의 상당량의 핵병기를 삭감하면 작은 핵보유국들은 그들의 병기의 감축을 촉진하게 된다. 
 
신흥 핵보유국들은 그들의 이웃 국가들과 문제 해결의 절차에 참여하도록 설득한다. 동시에, 핵물질의 이전은 막아야한다.  이 이유는 오히려 최종 분석에서 간단하게 나타난다.

소련이 붕괴 후, 세계의 양극질서의 존재는 사라졌으며, 핵무기는 이제 이전 (以前)의 공포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핵무기는 확산되었으며, 테러리스트가 핵물질을 획득할 위험은 증대되었다.  이 소용돌이는 핵폭발을 피하기 위해 막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 폭발은 멀리 있는 섬에서만 시험하는 것은 아니다. 

핵 없는 세상을 위한 노력은 현실적인가 ?  적어도 그 노력은 믿을만하다.  조지 슐츠에 의하면,  미국의 국익조차 미국의 핵무기 유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핵무기를 갖지 않으면 우리는 더 안전할 것이라 믿는다. 다른 나라들도 그 진실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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