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2일 일요일

統一論議 (31) 침묵의 교회



북한 지역에 종교가 있는가 ?  평양 정권의 사회주의 헌법은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광복 전 북한 지역에는 개신교, 천주교 등이 한국보다 먼저 전파되는 등 종교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1950년 당시, 천도교와 불교, 개신교 그리고 천주교 등 약 200만 명의 종교인이 있었으며, 이것은 당시 북한 지역 인구의 22%의 수준이다 (조선중앙연감. 1950).

그러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권에 기여하는 한도 내 일시적 공존 상태가 유지되었으나, 6,25전쟁 중에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월남하고, 전쟁 이후의 혹독한 종교 탄압으로 북한 지역 내 종교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더욱이, 6.25전쟁의 참상으로 주민들 사이에서는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기독교에 대한 적대 감정으로 동일시되는 경향이 일반화되면서, 북한 사회에서는 종교 자체의 존립 근거가 상실되었다.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은 북한 주민들의 반미 감정은 그 자체로 전후의 반 종교 선전 기능을 훌륭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국제 환경의 변화와 함께 평양 정권은 대외 선전과 대남 통일전선 구축 등 전략적 필요성에 따라 종교 단체들의 활동을 재개했다.

오늘날, 북한 지역 내 대표적인 종교 단체로 활동하고 있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등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으로 남북 대화가 시작되면서 조직되었다.

그 뒤, 1980년대 들어, 조선천주교인협회 (1999년 조선카톨릭교협회로 개칭)와 조선종교인협의회가 새로 생겼다.

특히 1980년대부터는 교회와 성당의 건립과 불교 사찰의 복원, 보수 등 가시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 왔다.

1988년에는 평양에 장충성당과 봉수교회를 세웠고, 1992년에는 평양에 칠골교회도 건립했다.

불교계도 1988년에 묘향산 보현사의 석탄절 법회를 시작으로 1999년 이후 계속해 온 개성 영통사와 금강산 신계사의 복원 사업도 2006년에 마무리하였다.

모든 종교단체들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 (제6과)에서 관할하고 있다.

평양 정권의 종교 인식은 마르크스의 종교관과 유사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종교는 부르주아 지배 계급의 역할을 정당화하고, 혁명 의식을 약화시키는 부정적 역할을 한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한 말은 착취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혁명 의식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평양 정권은 종교를 “지배 계급의 착취 도구”라는 부정적 인식으로 사상 교육을 통해 말살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1980년대 중반까지 대내 종교 제거 정책의 근거가 되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계급적 관점에서 무조건적으로 비판적이던 기존 정책에서 다소 탈피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의 급격한 세계 질서의 변화와 함께, 남북 간 종교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평양 정권은 종교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나름의 “주체적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즉 “사회적 인간의 염원을 환상적으로 반영하면서,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또는 믿음의 세계관” 이라는 설명으로 기존의 부정적 인식을 크게 완화하고 있다.

한편, 주체사상의 종교관은 인류 초기의 세계관은 자주 의식과 창조적 능력이 낮은 비과학적 현상이라고 내세우면서, 종교의 본질에 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부정적 해석에 비판을 가하는 차별화를 도모하고 있다.

주체사상은 종교는 압박과 착취, 불평등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하는 것으로, 타자에 의한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기독교 신학의 중심적 영적 구원은 거부하고 있다.

결국, 주체사상을 통하여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집단주의적 “대중 (Mass)"으로 찬양하는 대신,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개인 (Indivisual)“은 신에 의지한다는 점을 문제시한다.

평양 정권은 “신앙의 자유”를 대외적으로 내세우면서, 우회적인 방법으로 대남 종교계 통일전선 구축의 시도를 해 왔다.

1974년, 그들의 제네바 대표부를 통한 세계기독교협의회 (WCC) 본부와의 접촉을 시작으로 1975년, 인도 코타얌의 아시아기독교평화회의 (ACPC) 총회, 1976년, 체코슬로바키아 부르노의 세계기독교평화회의 (WCPC)와 동년 인도 뉴델리의 아시아불교도평화회의 (ABCP) 참석 등을 들 수 있다.

종교에 관한 평양 정권의 헌법 규정도 조금씩 바뀌어왔다. 1972년 사회주의 헌법에는 “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 종교 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였으나, 1992년 개정 헌법에서는 종교를 억압할 수 있는 단서 조항을 신설했지만, “반 종교의 자유”를 삭제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

이처럼, 평양 정권이 종교에 관해 고심하는 한편, 종교 활동에 조금이나마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북한 지역에 종교가 없다는 주장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며, 국제 사회의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될 뿐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종교를 대남 교류와 연계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평양 정권이 종교에 대하여 전향적인 자세를 갖게 된 것은 남북 간 대화 시작의 시점이라 할 수 있는데,  1990년대 이후 식량난을 계기로 한국과 외국 종교 단체들이 인도적인 지원 활동을 하면서 북한 지역의 종교 단체의 활동도 보다 활성화되었다.

셋째,  종교 활동이 더 이상 체제 안전에 위협 요인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의 가능성이다.

평양 정권 수립 후, 거의 30년 간 이어 온 독재 통치의 강화로 종교가 정치적 도전 세력이 되기 힘든 상황이라는 점이다.

북한 지역에서는 모든 북한 주민들이 자유로이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도의 수가 극히 제한되어있을 뿐 아니라,  북한 주민들은 찬송가를 모르며, 교직자들도 종교에 관해 단편적인 지식만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개신교의 공식 교회는 평양의 봉수교회와 칠곡교회 2개뿐이다.  목사는 설교 중간에 수령에 대한 은혜를 강조하고 있으며, 출석 신도의 수는 100~300 명 정도이다.

불교는 조계종을 표방하고, 승려는 머리를 기르고 있으며, 절에 상주하지 않는다.  현재, 승려 300 여 명이 각지 60개 사찰에 배치되어 있다.  신도는 1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사찰은 종교적 의미와 기능보다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더 강조되고 있다.  석탄절과 열반절, 성도절 등 불교 기념일 예불과 법회도 열리지만, 주로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찰은 승려가 관리하는 조선불교도연맹 소속 사찰 (전체의 1/3 정도)과 문화유물총국이 문화재로 관리하는 사찰로 구분된다. 이 사찰에는 승려가 없고 관리인만 상주한다.

이렇듯, 종교적 구원 목적에서 불공을 드릴 수 있는 사찰은 사실상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신도의 대부분이 당원 신분이며, 당국의 허락을 받은 사람에 한해 사찰 출입이 가능하다.  사찰의 설법은 주체사상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광복 이전 북한 지역에는 평양교구와 함흥교구, 덕원교구 등 3개 교구와 50여 개의 성당에 5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으나, 분단 후 천주교는 거의 소멸되었다.

바티칸교황청은 한국의 주교 (현재 정 진석 추기경)를 평양교구와 함흥교구장서리로 임명, 관할권을 위임하고 있다.

공식 성당은 1988년에 건축된 평양 장충성당이며, 일요일에는 100~200 명의 신자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다.  강론은 교리 해설과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 그리고 반미 선전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 지역의 천주교 대표 단체는 조선카톨릭교협회인데 교황청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남북 분단 이후, 이어지고 있는 남북 간의 상호 불신의 해소와 민족의 동질성 회복에는 남북 간 인적, 물적 교류 협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데 이론이 없다.

그 가운데 종교 교류는 정신적, 심리적 동질성 회복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북한 지역은 평양 정권의 체제의 속성상, 당과 국가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남북의 종교 교류는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 정권의 대 종교 인식과 태도 변화는 남북 종교 교류의 진척과 관계가 있다는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남북의 종교 교류는 남북 간의 상호 이해와 신뢰 축적으로 서로의 이질성을 극복함으로써 장차 한반도 통일에 기여한다는 기대와는 달리, 평양 정권은 체제 생존 전략에 이용해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의 기능주의적 통합 이론의 기대치는 상당한 효과를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의 식량난을 비롯한 악화된 경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종교 단체들의 남북 간 교류가 보다 적극성을 띄어감에 따라 북한 지역 내 종교 현상도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음이 감지되고 있다.

평양 정권의 이 체제 종교는 종교 개방을 주저할 수밖에  없겠지만, 한국의 종교계는 시간이 더디더라도 창의적인 주도적 노력으로 일관된 남북 종교 교류의 활성화와 나아가서 교류의 제도화의 길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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