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2일 일요일

북한 지역의 문화재



북한 지역의 문화재는 한민족 공동의 유산이며, 나아가 세계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귀중한 자산이다.

평양 정권이 북한 지역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면서, 민족문화유산을 계승 발전시켜온 것은 민족문화 자체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여 활용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정권의 정통성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민족문화유산의 계승발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주민들을 위한 교양 가치 유무에 기준을 두어 문화재 정책을 강조해 왔다.

< 문화재 정책 >

시대별 정치 상황에 따른 인식 변화와 함께, 문화재 정책도 체제 선전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펴왔다.

정권 수립에서 1950년대에는 고구려의 궁궐이었던 대성산의 안학궁터를 발굴함으로써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의 역사성을 부각시켜 주민들에게 정통성을 보여주려고 의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에는 김일성 우상화 운동과 하께, 문화유산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 때, 평양중앙력사박물관의 신설을 비롯하여 개성, 사리원, 해주, 신의주, 원산, 함흥, 청진,  등지에도 역사박물관을 복구하거나 신설 했다.

1970년대 들어 주체사상이 완성 단계에 접어들면서, 모든 문화예술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선전하는 도구로 동원되기 시작했다.

김일성 우상화 확립을 통한 1인 독재체제를 제도화한 1972년 12월의 사회주의헌법은 37조에 “민족문화유산을 사회주의 현실에 맞게 계승 발전시킨다.”고 하면서 공산주의 혁명과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동명왕릉과 같은 고구려 시조묘의 발굴은 그것이 평양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자주노선을 천명한 이후, 역사를 주체적 입장에서 체계화하여 역사유물을 복구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이 원칙은 문화유산을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유적의 발굴과 복원에 당성과 노동계급성과 역사주의적 원칙을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1970년대 이후에는 인민의 애국심을 진작시키는 방향으로 문화유산을 활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1985년에는 문화유적과 유물에 대한 기본방침을 설정, 각 행정기관과 학교, 단체 등에 그 관리를 분담시키고, 매년 4월과 11월을 문화유적 애호월간으로 정하여, 모든 기관들이 집중적으로 해당 문화유적과 유물의 보존관리사업을 진행하도록 하고 있다.

1990년대는 김일성의 사망과 김 정일 체제의 등장 그리고 동구 공산권의 붕괴 등 격변 시대로 전권 차원의 애국주의 무장이 절실하게 요구되어, 1994년 총 6장의 문화유물보호법을 처음 제정하여 법제화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바로 민족문화유산에 대한 발굴, 복원, 전시 그리고 주민들에 대한 교양사업의 강화를 통해 민족전통을 사회주의 생활양식에 맞게 계승 발전시켜,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강력하게 추진해 나간다는 내용을 표방한 것이다.

이에 따라 문화유적에 대한 발굴과 유적의 복원을 활발하게 추진하여 이를 “정권의 정통성” 주장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사찰 광법사 (‘90.평양), 동명왕릉(’93.평양), 단군릉 (‘94.평양), 왕건왕릉 (’94.개성)의 개축과 복원, 세계유산보호협약 가입 (1998년7월), 유네스코 제28차 세계유산위원회 (WHC, 2004년7월)의 고구려 고분유적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은 1990년대 이후 민족사의 정통성이 평양에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일련의 계획적 사업이었다.

문화유물보호법은 “문화유물”로는 원시유적, 성, 봉수 터, 건물, 건물터, 탑, 비석, 무덤, 도자기 가마터, 쇠부리터 등 역사유적을, “역사유물”은 생산도구, 생활용품, 무기, 조형예술품, 고서적, 고문서, 인류화석, 유골 등을 규정하고 있다.

무형문화재는 민족문화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모든 민족문화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맞게 개조하여 체제 선전과 주민 교양사업에 이용해 왔다.

사회주의 이념에 배치되는 유교와 불교 문화재, 민속자료 그리고 민속놀이 등의 무형문화재는 문화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분류하고, 전통 민속놀이는 조선민속놀이로 명명하여 문화재와는 별도 취급을 하고 있다.

천연기념물과 명승지는 다른 법체계인 명승지‧ 천연기념물 보호법 (전문 42장 34조. 1995년12월 제정)에 의해 국가가 특별히 지정하고 보호하는 지역이나 자연물로서 명승지에는 산, 바닷가, 호수, 폭포, 계곡 등을, 천연기념물에는 동식물, 화석, 동굴, 자연바위, 광천 등을 규정하고 있다.

< 문화재 현황 >

지금까지 확인된 북한 지역의 공식 지정 문화재는 국보유적 193, 보존유적1,723, 국보유물83, 준 국보유물121, 명승지223, 천연기념물467건이다.

이 가운데 목록이 확인된 국보유물 193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형별로 구분하면 일반건축이 68건이며, 궁궐, 관아, 문루, 성곽, 서원, 향교, 정사, 사묘, 일반가옥 등이 포함된다.  성곽은 평양 지역의 평양성 등 대부분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이다.

사찰건축은 45건이며, 사찰, 암자, 절터 등이다.  사찰건축이 국보유적으로 지정된 것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평양 정권이 건축물에 스며들고 있는 인민들의 우수한 재능이 민족문화유산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찰들은 고구려시대 창건된 유적 7건, 고려시대 개창된 유적 8건과 나머지는 모두 조선시대에 개창, 개축 및 증축된 것이다.

고분유적은 25건이며, 고인돌, 왕릉, 벽화고분 등이다.  

평양 정권은 고조선시대의 유적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5천년 전에 단군조선이 평양을 중심으로 대동강 유역에 세운 세계 최초의 고대국가의 하나로 청동기문화에 기초하여 형성된 선진문명임을 자부하기 위해 발굴 복원한 단군릉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동명왕릉, 고려의 왕건릉이 포함되고 있다.

이것은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평양 정권의 정통성 확립의 푯돌이 되고 있다. 또한 고구려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의 양상과 위상을 판단하고 이해하는데 중요성을 갖는 고구려 고분과 고분벽화도 다수를 차지한다.

석조물 41건은 탑16, 비석10, 부도 (浮屠), 당간지주 (幢竿支柱), 마애불 (磨崖佛), 석등 등을 포함하며, 대부분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기타 14건은 주거지, 요지 (窯址), 우물, 범종, 불상 등이다.

국보지정 대상에는 새롭게 복원된 유적도 포함되어 있다.  평양 동명왕릉 바로 앞에 있는 정릉사 (定陵寺)의 8각 7층 석탑과 평양 광법사 (廣法寺) 8각 5층 석탑은 원래 목탑으로 터만 전해오던 것을 석탑으로 새롭게 복원하여, 국보유적 제184호, 제185호로 지정하였다.

황해남도 구월산의 환인 (桓因), 환웅 (桓雄), 환검 (桓儉:檀君) 세 성인의 제사를 지내던 사당은 일제 때 소실되어 그 터만 남아 있던 삼성사 (三聖祠)에 삼성전 (三聖殿)을 복원 (2000년 9월)하기도 했다.

신라 법흥왕 5년(519년)에 창건된 유점사 (楡岾寺), 장안사 (長安寺), 표훈사 (表訓寺)와 함께 금강산 4대사찰로 알려진 국보유적 제191호 신계사 (神溪寺)는 한국의 불교종단 조계종과 북측이 공동으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공사하여 대웅보전, 만세루, 극락전, 어실각, 나한전, 축성전, 칠성각, 산신전, 범종각 등 10개 주요 전각 (殿閣)을 복원했다.

또한 개성의 국보유적 제192호 영통사 (靈通寺)도 한국의 천태종의 지원으로 복원 (1998년~2005년)되었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 전승기념 전공비인 북관대첩비 (北關大捷碑, 국보유적 제193호)는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되었던 것을 한‧일양국의 외교 노력을 통해 한국으로 반환 (2005.10)되어, 2006년 3월1일, 비석의 원래 자리인 함북 길주에 복원되었다. 

유적별 개황을 살펴보면, 선사유적인 구석기 시대 유적은 15곳에 달하는데 거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석회암 동굴유적이다.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는 10여 곳이 발굴 조사되어 소개되고 있는데, 모두 주거지(住居址) 유적이다.

청동기 시대 유적은 함북 굴포리 서포항 유적 등 11곳이 대표적이고, 무덤 유적으로  6곳의 고인 돌 유적이 있다   고조선 시대 유적은 평북 영변 세죽리 유적 등 4곳이 있다.

북한 지역에 분포되고 있는 많은 고구려 고분(古墳)은 지역적, 시대적 그리고 문화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고분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桓仁)과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중류 북안 지역과 평양 쪽으로 대동강 유역에 돌무덤(積石塚)과 봉토분(封土墳) 으로 나타나 있다.

고구려 고분군은 모두 63기 (벽화 고분16기포함)이며, 2004년 7월, 유네스코 제28차 세계유산위원회(WHC)는 고구려 고분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 문화재 관리 실태 >

평양 정권이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체제의 이데올로기에 맞춰 역사를 날조하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북한 지역의 상당수의 문화재도 정확한 고증과 검토도 없이 무분별하게 복원되고 있는 점은 큰 문제점이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의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급격한 체제 붕괴는 평양 정권에게 다시금 민족의 특수성을 강조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워 정권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차원에서 199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전통문화 및 문화재 발굴과 보존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정권의 정통성을 과시하기위해 평양 지역의 유적 발굴과 복원에 전력투구하기에 이뤘다.

정릉사 (定陵寺, 평양 역포구역)는 고구려 시대 동명왕릉의 능찰로 터만 남아있던 것을 동명왕릉과 함께 1991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3년 복원되었다. 

사지의 터에 깨끗한 화강석으로 팔각석탑을 올리고, 여러 전각도 세웠지만, 현재까지도 사찰로서는 전혀 기능하지 않고, 다만 동명왕릉 참배객들에게 보여주는 관광자원에 불과한 상태이다.

정권의 심각한 경제난은 문화재 보수와 복원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보수나 복원 시 사용되는 원자재의 부족을 들 수 있다.  도색과 보수는 생각할 엄두도 못 내고 있으며, 단청을 사용해야 할 곳에 부분적으로 페인트를 사용하기도 한다.

복원 시, 원본그대로 복원은 불가능한 형편이다.  복원을 하려면 원색 도안을 갖고 복원 전문 인력이 해야 하나, 그렇지 못하고 만수대 미술창작사나 지방 미술제작소 등에 소속된 일반 화가들이 덧칠하는 정도다.  

따라서 원본과는 달리 훼손될 소지가 크다.  이와 더불어 문화재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많은 목조문화재들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문화재 보존 기술이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도면 작성 등 기록관리가 부실해  훼손된 문화재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무분별한 모조품 제작으로 모조품이 진품으로 둔갑하여 외부로 유출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문화유물의 도굴이나, 유실, 유출 문제도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일본 등 북한 지역의 도굴문화재의 해외 밀반출은 1989년 평양 축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과 아리랑축제)이후 확산되었으며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1990년대 이전에는 당과 정부기관 그리고 군부대, 사회단체 등이 조직에 할당된 외화벌이 할당량을 채우는 방법으로 공식적으로 활용되었다.

군부대까지 동원하여 개성 인근에서 고려자기를 발굴하기도 했으며, 무역회사, 합영 회사, 공사 등의 이름을 가진 외화벌이 대외무역기구를 창구로 반출되었다.

1990년대 들어, 문화재 유출이 금지되면서 주민들이 보관 중이던 문화재가 거래업자들에 의해 밀반출되기 시작했으며, 개성 인근, 황북, 평남 등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도굴이 성행하였다.

도굴 문화재는 군과 정보기관의 비호아래 비밀리에 반출되고 있으며, 주로 고려 중기, 조선 시대의 도자기와 고서화 등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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