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2일 월요일

승자 독식 론 (Winner Takes All Theory)


Winner Takes All Theory
Abstract
 
 
This theory emerged after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and was prevalent throughout the Cold War.
 
 
During this time, the two Koreas were locked in a bitter battle over legitimacy.
 
 
The deadly Korean War was not only a struggle among regional powers, it was fought by the North and South to have their respective ideological systems and governments recognized as the “one true Korean nation.”
 
 
Even after the Korean War ended, this struggle for legitimacy continued with the notion of “unification by force.” or the idea that the only real definition of unification was the crushing victory of one Korea over the other.
 
 
Republic of Korea presidents Rhee Syngman and Park Chung Hee both subscribed to this “winner takes all” view.
 
 
The same view was also held by Kim Il Sung in the North. The concept dominated both policymaking and the associated academic literature.
 
 
After the establishment of separate governments in 1948, the two Koreas continued to fight each other but also struggled to gain control over domestic enemies that challenged their respective regimes.
 
 
It was the ultimate zero-sum game, and the two Koreas’ rigid ideological beliefs dictated that any small concessions made to the other side would not only be seen as a “loss of face” but was an acknowledgement of the superiority of other’s system of governance.
 
 
Due to this zero-sum mentality, contact between the two sides was nearly nonexistent for almost 20 years following the conclusion of the armistice that ended the Korean War.
 
 
The Cold War mentality continued to dominate inter- Korean relations and formulation of unification policy even as the global strategic environment began to change in the late 1980s.
 
 
This “winner takes all” or “zero-sum” theory of unification dominated the plicymaking process and academic studies on unification until the early 1990s.
 
 
The irony of this period-which dominated the thinking about unification on both sides of the peninsula-is that while each side strove for unification in its national objectives and national rhetoric, neither really studied unification.
 
 
There was no empirical understanding of what unification entailed, and what the policy challenges would be.
 
 
In sum, unification was a national slogan for both Koreas, full of fiery rhetoric, but without substance.
 
 
    
승자 독식 론
 
 
이 통일 담론은 한반도 분단 후에 나왔으며, 냉전 시대에 걸쳐 퍼졌다.
 
 
이 기간 동안, 남과 은 정통성을 둘러 싼 전투에 완전 몰입했었다.
 
 
치명적인 6.25전쟁은 지역 세력들의 투쟁일 뿐 아니라, 남과 이 각자의 사상 체계와 진정한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임을 인정 받기위한 투쟁이었다.
 
 
6.25전쟁 후에도, 이 정통성 투쟁은 힘에 의한 통일개념이나 상대방에 대한 압도적 승리만이 실제 통일이라는 사상으로 일관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 승만과 박 정희는 공히 이 승자 독식의 견해를 지지했다.
 
 
의 김 일성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이 개념은 정책 결정과 관련 학술 문헌 모두를 지배했다.
 
 
쌍방의 강경 입장은 대규모 국제 냉전은 물론 내부의 경제와 정치적 도전으로 굳어졌다.
 
 
1948년 서로 다른 정부 수립 후에도, 남과 은 각각의 정권에 도전하는 국내의 적을 지배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그것은 세 가지 다른 수준에서의 최후의 제로섬 (Zero-sum)게임이었다.
 
 
남과 의 엄격한 이념적 신념은 상대에 대한 어떤 작은 양보도 체면 손상뿐 아니라, 상대의 통치 방식 시스템의 우월성 인정으로 규정했다.
 
 
6.25전쟁 여파로, 남과 은 더 강력하고 번창함을 과시하기 위해 야심찬 경제 개발계획에 착수했다.
 
 
이 제로섬 사고방식 때문에, 남과 의 접촉은 6.25전쟁을 끝낸 정전 협정 체결 후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 들어, 냉전 교착 상태에서 약간의 해빙이 나타났다.
 
 
남과 의 적십자사는 이산가족 상봉 협상을 시작했고, 또 다른 쌍방의 정보 수장 (首長)의 고위급 회담은 197274, 놀랄만한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공동 성명이 규정한 조국통일 3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한다.
 
 
셋째,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한다.
 
 
이 성명은 적어도 수사적으로 남과 의 평화 통일 원칙의 새 비전을 제시했다.
 
 
그리고 7.4 남북공동성명 제6항에 따라 설치된 남북조절위원회는 남북 간의 제반 문제와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가동되었다.
 
 
남북 대화가 중단된 이후 대화 중단의 책임 문제와 한반도 평화 문제를 둘러싼 남과 의 공방이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1974815일 대통령 저격사건, 19741115일 남침용 땅굴 발견 등이 이어지고 베트남 전쟁이 종결단계로 접어들면서 남북조절위원회의 정상화는 무산되었다.
 
 
1980년대, 스포츠 교류와 의회 회의,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 회의를 포함한 약간의 남북교류가 있었다.
 
 
평양은 심지어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도 제의했다.
 
 
하지만 화해 노력은 1983년 랑군의 전 두환 내각 폭살과 1987KAL 858기 폭파 사건 등 정권의 치명적인 여러 도발로 좌절됐다.
 
 
정권의 서울 올림픽에 대한 계획된 방해 공작도 결국 저지됐다.
 
 
냉전 사고방식은 1980년대 세계의 전략 환경이 변하기 시작했어도 남북 관계와 통일정책 수립을 계속 지배했다.
 
 
어떤 타협이나 양보도 상대에 대한 패배를 의미했다.
 
 
민주 자유세계와 사회주의/공산주의 블록 간의 냉전 교착 상태의 오래 지속된 유물인 정책들은 남북 관계의 진전을 사실상 불가능케 했다.
 
 
승자 독식이나 제로섬통일 이론은 1990년대 초반까지 정책 결정 과정과 통일의 학술 연구를 지배했다.
 
 
한반도의 양쪽에서 통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지배했던 이 시대의 아이러니는, 양쪽 모두가 각기 국가 목표 내 통일과 민족주의 발언을 위해 노력했지 정말 통일 연구는 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통일이 수반하는바 경험적 이해와 정책 도전 같은 것은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해서 말하면, 통일은 남과 모두의 아무런 실체도 없는 맹렬한 발언으로 가득 찬 국가의 구호였다.
 
MUSIC
Brahms-Hungarian Dance No.1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