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일 월요일

어느 한 탈북자의 후회 (A North Korean Defector's Remorse)


A North Korean Defector’s Remorse
Abstract
 
Since the late 1990s, some 28,000 North Koreans have fled to the South.
 
 
Ms. Kim, 45-year-old dressmaker from North Korea, says her defection to the South four years ago was a terrible mistake.
 
 
She says she has been trying since she got here to return to the impoverished, repressive North to be with her husband, daughter and ailing parents.
 
 
But her efforts have only brought her more trouble, including imprisonment on spying charges.
 
 
“Freedom and material and other lures of any kind, they are not as important to me as my family and home.” a tearful Ms. Kim said at a new conference in Seoul.
 
 
“More than anything else, I want North Korea to recognize that I am not a traitor and that I have never, ever, not even for a blinking moment, forgotten my fatherland.” she said for The New York Times.
 
 
Ms. Kim’s improbable story began in 2011, when she traveled to China to visit relatives and obtain treatment for a liver ailment.
 
 
There, she said, she met a broker who said he could smuggle her into South Korea, where she could make a lot of money in a few months and return to China.
 
 
Although she was married to a doctor in Pyongyang, and well off by North Korean standard, she said she signed on with the smuggler with the aim of helping to pay her medical bills.
 
 
At some point before arriving in the South, she realized this was a bad idea. But the smugglers had confiscated her passport and said there was no turning back.
 
 
“I also feared that if I was caught without a passport and deported back to the North, I would be found out and treated as a traitor for trying to flee to the South.” she said in an interview.
 
 
Passing through Thailand, she submitted a handwritten statement agreeing to defect, a requirement for North Korean refugees to be allowed to enter the South.
 
 
She signed, as all defectors do, a document disavowing communism and agreeing to become a law-abiding citizen of the South.
 
 
She repeatedly called a North Korean consulate in China asking for help. Denied a South Korean passport, she tried forging one.
 
Then she did something that she now characterizes as a dumb mistake but that appears to have been wildly ill advised.
 
 
She began to spy for the North, she said, collecting cellphone numbers and other personal data of other defectors in the South.
 
 
“I foolishly thought that once they believed I was spying, they would deport me as a troublemaker.” she said.
 
 
At trial, she told the court that the North Korean consulate had instructed her to spy, and said that she had handed over her data to a Communist agent in a stadium in Seoul where she went to watch a women’s soccer match between the two Koreas in 2013.
 
 
She was convicted and sentenced to two years in prison. In April, after she had served nine months, an appeals court suspended her sentence, saying that her confession was a mitigating factor.
 
 
“Her conduct is too absurd to be a spy’s.” said a human right lawyer helping Ms. Kim.
 
 
It is difficult to parse the motivations behind such comments, separating the state-instilled patriotism from state-induced fear.
 
“ One thing I learned is how ignorant North Koreans like myself were about how things work in the South. just as South Koreans don’t understand North Korea,” Ms. Kim said.
 
 
 
어느 한 탈북자의 후회
 
 
1990년대 후반부터 28,000 명의 탈북자들이 한국에 정착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바로는, 단 한 사람만이 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한다.
 
 
탈북자 김 (45, 여 재봉사)4년 전 한국에 귀순한 것은 끔찍한 실수였다고 말하고 있다.
 
 
김은 한국에 오면서부터 남편과 딸, 그리고 병든 부모가 있는 가난하고 억압받고 있는 으로 돌아가겠다고 애써 왔다.
 
 
그러나 김의 노력은 스파이 혐의로 구금되는 등 더 어려움만을 가져왔을 뿐이다.
 
 
최근 서울에서의 기자 회견에서 김은 자유와 풍요로움 그리고 어떤 종류의 다른 유인제도 나의 가족과 집만큼 중요하지 않다. 나는 굶어 죽더라도 나의 소중한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울면서 말했다.
 
 
그러나 기괴한 왜곡에 가득차고 막다른 골목에 처한 경우이지만, 정부는 김을 되돌려 보낼 수 없다.
 
 
김은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무엇보다, 나는 반역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 인정하기를 바란다. 나는 결코, 잠시라도, 나의 조국을 잊은 일이 없다.”고 말했다.
 
 
통일부 대변인은 김은 스스로 한국시민이 되었다. 이에 따라 김은 모든 한국국민에 적용되는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고 말했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익명으로 매우 이례적인 이 경우에 관해 우리는 그녀의 슬픈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러나 바로 지금 현행 법 하에서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김의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는 2011, 김이 간 질환 치료를 받기 위해 중국에 있는 친척을 찾아갔을 때 시작되었다.
 
 
거기서, 김은 한 브로커를 만났다. 브로커는 김을 한국에 밀입국시킬 수 있으며, 몇 달 안에 많은 돈을 벌고 중국에 돌아 올 수 있다고 했다.
 
 
김은 평양에서 의사와 결혼하여 북한 지역 기준으로는 잘 살고 있었으며, 의료비 마련을 위해 밀수업자의 말을 믿고 계약을 했다.
 
 
김은 한국에 들어가기 전 어느 시점에, 이것은 나쁜 생각이라고 깨달았다. 그러나 밀수업자는 그녀의 여권을 몰수했으며, 일은 다시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김은 나는 여권 없이 잡혀서 으로 추방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탈북하려는 반역자 신세가 될 것이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한국에서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으며, 동료 한국인들이 나를 이해하고 집으로 가는 방법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태국을 경유하면서, 김은 탈북자의 한국 입국을 위한 요건인 망명을 동의하는 자필 서약서도 제출했다.
 
 
하지만, 김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김은 모든 탈북자가 하는 것처럼,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법을 준수하는 한국 시민이 되겠다는 복명서도 작성했다.
 
 
김은 장기간의 가출로 평양의 가정은 이미 위험에 빠졌으리라는 두려움과 절망으로 어쩔 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은 밀수업자도 만났으며, 주 중국 영사관에도 여러 번 전화통화를 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 여권이 거부됨에 따라, 김은 위조 여권을 만들려고도 했다.
 
 
김은 지금 생각해도 멍청한 실수인 하나의 큰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무분별한 조언이었을 것이다.
 
 
김은 을 위해 스파이 노릇을 시작했다고 말 했으며, 한국 내의 다른 탈북자들의 휴대전화 번호와 인적사항 등을 수집했다.
 
 
김은 나는 어리석게도 당국이 나를 스파이로 지목하면, 나를 말썽꾸러기로 여기고 추방하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은 심지어 경찰에 자기의 스파이 활동을 신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은 스파이를 추방하지 않는다.
 
 
작년 7, 김은 스파이 행위와 여권 사기로 기소됐다.
 
 
재판에서, 김은 영사관이 자기에게 스파이 활동을 지시했고, 2013년 서울에서 개최된 남북 여자 축구대회 시 운동장에서 공산주의 요원에게 자기가 수집한 자료를 넘겨주었다고 진술했다.
 
 
김은 2년 형의 유죄판결을 선고받았다. 9개월 복역 후 지난 4, 항소 법원은 그녀의 형 집행 유예를 선고했다. 김의 자백을 경감 요인으로 봤기 때문이다.
 
 
김은 가석방되고 감시를 받게 되었다.
 
 
김을 돌봤던 한 인권 변호사는 그녀의 행위는 스파이 활동으로서는 너무 터무니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한국도 그녀와 같이 으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의 논의를 할 때이다.”라고 부연한다.
 
 
김의 경우 한국에서는 많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6.25전쟁으로 생긴 수만 명의 이산가족의 땅에서 생긴 또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권은 이 사건에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은 모든 탈북자들을 반역자로 취급하며, 때론 에 남은 가족들을 정치범 수용소로 보낸다.
 
 
김은 현재 영천의 한 재활용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이 애착으로 김은 한국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평양에 있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은 그녀의 한국 내 휴대전화 마지막 네 자리 숫자는 김일성의 생일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김은 김일성을 자신의 친아버지처럼 숭배하며, 지난 2013년 축구 경기 시 의 국가 아침은 빛나라...”를 눈물을 흘리며 불렀다고 말했다.
 
 
김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무엇보다도, 나는 반역자가 아니고, 나의 조국을 한 순간도 잊은 일이 없다는 것을 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스파이로 잡히면 이것은 적어도 내가 조국을 버리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의 이 모든 발언을 종합하여, 정권에 의한 공포와 정권이 주입한 애국심과 분리하여, 그 배경의 동기를 분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배운 한 가지는 나와 같은 북한 지역 주민들이 한국을 너무 모르고 있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을 이해 못하고 있다.”고 술회한 김의 말에는 슬픈 이야기의 여운이 남는다.
 
MUSIC
Solveig's Song-Mirusia Louwerse, Andre Ri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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