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17일 월요일

대북 핵 협상의 실패 경험 (Failure Experience of Nuclear Talks with North Korea)



Failure Experience of Nuclear Talks with North Korea
Abstract
 
 
By any account, the Vienna negotiations were an unqualified success for Iran.
 
 
The reason for that is simple: the United States’ failed bipartisan North Korean policy set a model for would-be proliferators on how to negotiate one’s way to a nuclear weapon.
 
 
We are witnessing a nuclear march of folly. In order to prevent future similar outcomes, it’s of paramount importance that we understand the North Korean case.
 
 
The first mistake made by successive U.S. administrations, Democratic and Republican alike, in dealing with North Korea was perhaps the fatal one.
 
 
Each set of U.S. negotiators assumed, or convinced itself, that a deal could be reached that would ultimately persuade Pyongyang to abandon its goal.
 
 
Praising the 1994 Agreed Framework, which North Korea would cheat on, then-President Bill Clinton assured the nation that “North Korea will freeze and then dismantle its nuclear program. The entire world will be safer as we slow the spread of nuclear weapons.”
 
 
Wendy Sherman, the Clinton Administration’s policy coordinator for North Korea, argued in favor of a summit between then-President George W. Bush and dictator Kim Jong-il.
 
 
Christopher Hill, then-Bush Administration lead negotiator, hailed in the Six-Party Talks, claiming that “it is the DPRK commitment to abandon all nuclear weapons and existing nuclear programs” that justified U.S. concessions.
 
 
Washington’s second mistake in dealing with North Korea was of almost equal magnitude, namely, that any deal, even a bad one, was better than no deal at all.
 
 
U.S. negotiators convinced themselves that only by concluding some type of deal could America retain any leverage over the North Korea.
 
 
Chief Clinton negotiator Robert Gallucci repeatedly claimed, “We’d be better off with an imperfect deal than without it.” Yet in reality, just opposite has proven true.
 
 
A third U.S. mistake: taking the threat of force off the table.
 
 
Any regime worried about its ultimate existence could only see such a U.S. promise as surrender; it would no longer fear the consequences of stalling or cheating on any agreements that are made.
 
 
The fourth U.S. mistake is to commit to open-ended negotiations. This capitulation flowed naturally from abandoning the idea of using force.
 
 
Having adopted that position, the Bush Administration gave Pyongyang all the time it needed to build a successful nuclear program.
 
 
The fifth mistake in dealing with Pyongyang was to give up only means of pressuring the Kim regime. Most U.N. sanctions on North Korea were watered down by China and Russia in the Security Council.
 
 
Historians will one day have to account the fact that the diplomats of the world’s most powerful country are regularly bested by their opponents and repeat the same fatal mistakes.
 
 
Whether out of hubris, ignorance, or naivety, top U.S. officials consistently misread the fundamental nature of illiberal dictatorships.
 
 
 
대북 핵 협상의 실패 경험
 
 
미국과 유럽연합의 이란과의 비엔나 핵 협상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이란의 절대적인 성공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의 초당파 대북정책의 실패와 힘에 의한 위협을 외면한 모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하나의 협상에 실패하고, 이로써 또 새 결함이 있는 협상 사례를 만들어냄으로써 장차 위험한 정권에 의한 핵무기 확산은 불 보듯 확실해졌다.
 
 
우리는 미래의 유사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정권의 사례를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미국 외교의 첫 번째 실수는 민주당 및 공화당 공히 역대 행정부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매번 미국의 협상대표는 평양이 결국 핵이나 탄도탄 능력의 목표 달성을 포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확신했다.
 
 
이 속인 1994 제네바 합의를 높이 평가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은 정권은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폐기할 것이며, 전 세계는 핵무기 확산의 둔화로 더 안전하게 될 것이다.”라고 확신시켰다.
 
 
클린턴의 후계자와의 협상 중에도 정권은 2006년 첫 핵 시험을 강행했다.
 
 
2001,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조정관 웬디 셔먼은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의 김 정일의 정상회담을 주장하기도 했다.
 
 
201212, 셔먼의 기대와는 반대로, 은 알래스카를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탄도탄 시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클린턴과 셔먼의 견해는 완전히 워싱턴의 자기기만이었다.
 
 
더 나아가 터무니없이, 당시 부시 행정부의 협상 주역 크리스토퍼 힐은 6자 회담에서 모든 핵무기와 현존 핵 프로그램의 포기는 정권의 공약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경수로와 에너지 원조 및 경제 협력 등 양보를 정당화했다.
 
 
물론, 200610월에도 핵무기 시험을 했다. 이것들은 엄청난 규모의 오산이었으며, 희망사항이 거의 태만에 가깝다는 사례이다.
 
 
대북 협상에서의 두 번째 실수는 이른바 거의 같은 규모의 협상이었으며, 심지어 나쁜 협상도 전혀 합의 없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협상대표들은 어떤 형태의 결론의 도출만으로도 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했다.
 
 
클린턴의 협상대표 로버트 갈루치는 불완전한 협상이라도 없는 것 보다 낫다.”고 되풀이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은 바로 그것이 반대임을 입증하고 있다.
 
 
의 핵무기와 투발수단 능력을 부추기는 나쁜 협상이 이뤄지면서 미국의 나머지 영향력은 반대로 상실되었다.
 
 
이렇게 정권은 정권의 지속적인 생존 위협에 핵 보복이라는 새 위협 능력 덕분에 본질적으로 영구적인 면역을 받은 셈이다.
 
 
나쁜 뜻에서, 평양은 워싱턴이 협상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 상황은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정권이 힘의 입장에서 협상을 하며, 결국은 크나큰 원조를 받게 만들고 있다.
 
 
세 번째 미국의 실수는 협상에서 힘의 위협의 사용을 배제한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에서 정권을 침공하지 않겠다고 공약했으며, 힐은 20056자 회담에서 이 입장을 공식적으로 되풀이 확인했다.
 
 
궁극적인 생존을 걱정하는 어떤 정권일지라도 미국의 이와 같은 언질을 항복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네 번째 미국의 실수는 개방형 협상을 진행하는 우 ()를 범했다. 이 항복에 가까운 태도는 힘의 사용 아이디어의 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로 인하여, 부시 행정부는 이 성공적으로 핵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는 결과를 자초했다.
 
 
정권은 1994 제네바 합의로부터 첫 핵 시험까지 12년이 걸렸으며, 장거리 유도탄 시험까지 또 6년이 걸렸다.
 
 
이 기간 내내, 정권은 미국을 여섯 차례의 헛된 6자 회담에 묶어 놓았다. 협상 회담을 오래 연장할수록 상대방이 기정사실을 인정할 가능성이 커지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원래 목표인 것이다.
 
 
바로 걱정한 대로, 워싱턴은 세게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다섯 번째 실수는 김 정일 정권을 압박할 유일한 수단을 포기한 것이다.
 
 
정권에 대한 대부분의 유엔의 제재는 안보리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의해 희석되었다. 정권은 어떤 제재라도 그저 묵살했다.
 
 
하지만, 2005년 중반, 부시 행정부는 마카오의 방코 델타 아시아의 김 정일의 개인 자산 2,400만 달러를 동결했다.
 
 
이것이 평양에 부과한 가장 효과적인 제재였으며, 이 협상에 복귀하도록 강제했다.
 
 
그 후 부시 행정부는 다른 합의 도달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거의 모든 자산의 동결을 해제하기로 했다.
 
 
현금을 찾은 후 정권은 또 다시 약속에 부응하지 안했다. 그 후 6자 회담은 결렬되었다.
 
 
역사가들은 언젠가는 세계 최대강국의 외교관들이 어김없이 보잘 것 없는 상대방에 의해 농락당했으며, 같은 치명적인 실수를 반복했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오만함과 무지 아니면 순진무구함으로 미국의 고위 관리들은 시종일관하여 천박한 독재정권의 근본적인 본성을 잘못 읽었다.
 
 
미국 정책의 위험 회피성향은 외교에서 충실히 되풀이 되었다.
 
 
반복된 경험을 통한 희망의 승리라는 구상은 사실상 정권과 같은 독재정권이 외교적 협상이라는 보호 밑에서 그들의 목표를 성공적으로 성취하게 만든 미국식 모형을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
 
 
빈곤한 정권이 핵보유국이 된 것을 보면서, 미래의 핵 야망국은 핵 미래의 길을 찾기 위해 미국 협상가들의 협상의 잘못을 공부할 것이다.
 
 
미국이 끊임없이 얽매인 무의미한 협상은 핵무기가 보편화되는 세계의 창조에 기여하고 있다.
 
MUSIC
Caballeria Lig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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