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0일 월요일

미국의 신속한 6.25전쟁 참전 (America's Rapid Fight the Korean War)


American’s Rapid Fight the Korean War
Abstract
 
 
At the time the Korean War was fought, just five years after World War II ended, everyone recognized it as a world-shaping conflict, a stark confrontation between the forces of democracy and communism.
 
 
It began on June 25, 1950 when Soviet-backed communist North Korea crossed the 38th parallel and invaded the Republic of Korea.
 
 
Within weeks the communists had nearly absorbed the entire peninsula.
 
 
The United States at first was confused over whether it should-or even could-respond.
 
 
America had slashed its military budget after the end of World War II and was short both men and equipment.
 
 
It still had not awakened fully to the expansionist threat of Soviet Russia.
 
 
The Soviet-buoyed by their own recent development of an atomic bomb and Mao Zedong’s communist victory in China-sensed America’s lack of resolve and encouraged the North’s aggression.
 
 
Yet within weeks President Harry Truman rushed troops to save the shrinking ROK’s perimeter at Busan on the southern tip of the Korean Peninsula.
 
 
And by late September, 1950, General Douglas MacArthur had successfully completed the Inchon landings and launched counter attacks.
 
 
MacArthur quickly reclaimed the entire south and sent American-led United Nations forces far into North Korea to reunite the entire peninsula-only to be surprised when hundreds of thousands of Chinese Red Army troops crossed the Yalu River at the Chinese border and sent the outnumbered Americans reeling back into the South.
 
 
The fighting was fierce. Seoul, exchanged hands between communist and US led forces five times before it was finally secured.
 
 
During the year 1952 and 1953, the war grew static, neither side able to deliver a knockout blow.
 
 
Eventually the conflict ended with a tense armistice in July 1953. Over 35,000 Americans died in the Korean War.
 
 
The war marked the first major armed conflict of the Nuclear Age, and one in which the United States had not clearly defeated the enemy and thus not dictated terms of surrender.
 
 
Was fighting the Korean War and restoring the South-without uniting the entire peninsula-worth the huge cost in blood and treasure?
 
 
The American effort to save Republic of Korea also sent a message to both communist China and the Soviet Union that the free world, under U.S. leadership, would no longer tolerate communist military take overs of free nations.
 
 
The Korean War awakened the United States to the dangers of disarmament and isolation and led to the bipartisan foreign policy of containment of global communism that in 1989 finally led to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and with it victory in the Cold War.
 
 
The Korean War was an incomplete American victory in its failure to liberate North Korea and unite the peninsula, but a victory nonetheless.
 
 
And not just from a military perspective, but from a moral one as well.
 
 
미국의 신속한 6.25전쟁 참전
 
 
오늘날 6.25전쟁을 언급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멍한 눈으로 당신을 빤히 쳐다볼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불과 5년 후 싸움이 터졌을 당시, 사람들은 그 싸움을 세계의 미래를 결정하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세 대결로 인식했다.
 
 
1950625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정권이 한국을 침공하여 몇 주 내에 거의 나라 전체를 석권했다.
 
 
미국은 처음에는 대응할 것인지 또는 대응할 수 있을 것인지 어리둥절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군사 예산을 삭감했기 때문에 병력과 장비 모두가 부족했다. 그리고 그 때 소련의 팽창주의 위협도 완전히 깨닫지 못했었다.
 
 
소련은 자체의 새로운 원자 폭탄 개발과 중국의 마오쩌둥 (毛 澤東)공산당의 승리에 힘입어, 미국이 굳은 결의가 없는 것으로 느껴 정권의 침공을 부추겼다.
 
 
그렇지만 몇 주 내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 남단 부산 외곽에 움츠리고 있는 한국군을 구하기 위해 군대를 급파했다.
 
 
그리고 19509월 말까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반격에 돌입했다.
 
 
남한 전역을 수복한 후 미국 주도 유엔군은 한반도 전체를 재통합하기 위해 북한지역 깊숙이 진군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수십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미군은 남쪽으로 퇴각했다.
 
 
195012월 한국에서 최고 사령부를 인수한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비범한 재능 덕분에 미국 주도 유엔군은 100일 안에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냈다.
 
 
전투는 격렬했으며, 한국의 수도 서울은 다섯 번 빼앗기고 뺏은 혈투 후 마침내 완전 수복했다.
 
 
1952년과 1953년 동안, 피아 결정적 타격이 없는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마침내 19537월 이 싸움은 팽팽한 휴전으로 끝났다.
 
 
그리고 60년 넘게 스탈린주의 정권과 민주주의 경제 강국 한국 간 냉전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인 35,000명 이상이 6.25전쟁에서 죽었다.
 
 
이 전쟁은 핵 시대 최초의 주요 무력 충돌로 기록됐으며, 미국이 적을 분명히 물리치지도 못한 하나의 전쟁이고 항복시키지도 못했다.
 
 
6.25전쟁 싸움과 한반도 전체를 통합하지 않은 한국의 수복이 엄청난 생명과 재산의 희생을 치르게 한 가치가 있을까?
 
 
한국 구제의 자연 배당금은 오늘날 5,000만 시민에게 꿈에도 생각지 못한 자유와 풍요를 준 민주주의와 번영하는 한국의 진화 (進化)이다.
 
 
그리고 현대, 기아, LG 그리고 삼성 같은데서 생산되는 최고의 제품으로 세상을 축복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모범 시민이며, 미국의 혈맹이다. 정권과는 확연히 대조를 이룬다.
 
 
정권은 굶주리고 있으며, 수백만의 자신의 주민을 살해했다.
 
 
그리고 세계 공동체에 말로 헤아릴 수 없는 해악을 끼치고 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속한 개입과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평양의 괴물 정권이 핵무장 독재로 한반도를 지배했을 것이다.
 
 
한국을 구하기 위한 미국의 노력은 공산주의 중국과 소련 모두에게 미국 주도의 자유세계는 더 이상 자유주의국가의 공산주의 군사 탈취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쟁 억제정책은 공산주의 세계가 일본, 타이완 그리고 서유럽에 대한 유사한 기습 공격의 시도를 방지하는데 일조했다.
 
 
결국, 6.25전쟁은 미국이 군축과 고립의 위험을 깨닫게 했으며, 세계 공산주의 봉쇄를 위한 초당적 외교정책으로 1989년 마침내 소련 붕괴와 냉정 승리를 이끌어내게 했다.
 
 
6.25전쟁은 미국의 북한지역 해방과 한반도 통일 실패의 미완성의 승리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또한 도덕적인 승리였다.
 
 
그 이유는 6.25전쟁에서 죽은 35,000명의 미국인은 적어도 절반의 한국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게 했다.
 
 
한국은 미국에 이익을 줄 단 하나의 물질 자원도 갖고 있지 않았다.
 
 
6.25전쟁은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 이상의 가치가있다.
 
 
6.25전쟁은 자부심을 갖고 기억되고 공부할 가치가 있다.
 
MUSIC
Beethoven-Piano Concerto (Emperor) No,5 Allegro
Piano, Zimermen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