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2일 일요일

統一論議 (42) 민족주의 담론


              -- 이제는 대한민국 민족주의 시대를 열자 --

민족주의는 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국민국가의 형성을 추구하는 정치적 이념 및 운동을 말한다.

민족주의, 일명 내셔널리즘 (Nationalism)은 민족, 국민 또는 민족적 정체성을 사회 조직의 근본 단위로 하므로 국가 형성 (State Formation)의 방법과 국가의 유지 발전 형태가 나라와 시대에 따라 다르며 내셔널리즘의 사상 원리나 운동의 현상 또한 다양하여 국민주의, 국가주의 (Statism)로도 표현 사용되기도 한다.

< 민족주의의 등장 >

민족주의는 유럽에서 18세기 후반에 상업적, 정치적 변혁 과정에서 등장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일반적으로 전통적 농업사회가 붕괴되고, 산업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종족, 종교, 신분의 유대에서 시민이 해방되면서 민족이 새로운 충성심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는 일정한 영토에서 주권을 갖춘 국가 내 주민들이 공통의 문화를 의식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자각하는 과정으로 풀이된다.

원래 유럽 근대국가의 태동 과정에서 형성된 이 민족주의는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정치 공동체를 지향 했으며, 국민국가 탄생의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동력이었다.

17세기에는 영국에서 시작된 반봉건적 정치 운동으로, 왕이나 특권층에 속한 국가를 민족의 것으로 바꾸는 이론적 논거가 되었으며, 18세기 프랑스 혁명에서의 민족주의의 의미는 애국심으로 혁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18세기 이후, 민족주의는 미국의 독립에도 큰 기여를 했는데, 국가의 이익을 위해 다른 국가를 침략해도 된다는 제국주의, 파시즘, 나치즘 등 국가주의로 발전되기도 했고, 제3세계에서는 권위주의 체제의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함으로써 서구에서도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고전적 의미의 국가주의와는 달리, 식민지에서는 민족주의가 반제국주의적 계급 지향적 성격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의 식민지, 반식민지 등 세계 전역에 퍼져 나갔다.

대부분의 신생국들은 민족주의를 민족형성 (Nation-building)과 근대화를 위한 동원 이데올로기로 이용하였다는 특징도 갖고 있다.

이처럼 민족주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즉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의 과정에서 서구 식민세력에 대한 저항과 해방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였는가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 체제의 합리화를 위한 동원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 한국의 민족주의 >

한국의 민족주의는 근대 이전부터 동족 동류의식과 같은 혈연 중시의 순혈주의 (純血主義)에서 민족주의의 근원을 찾고 있으며, “한민족 (韓民族)”이라는 역사성을 가지고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민족의 문화적, 혈연적, 역사적 특징이 강조되어 왔다.

한국의 민족주의의 발생시기는 절대주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 서구 민족주의와는 달리, 19세기 중엽으로 잡을 수 있으며, 발생 계기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 위협에서 민족과 국가를 보전하려는데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독립 투쟁을 통하여 제국주의에 맞서는 민족주의로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여기서 민족주의 사관 (史觀)은 일제의 식민사관 (植民史觀)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나타나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켜 대중의 열망을 점화할 수 있는 뇌관 구실을 하게 되었다.

광복 후, 민족주의 활동은 국내 정치적 좌우익의 대립과 6.25전쟁, 남북 분단과 국제적 냉전 질서 등으로 극히 제약되었으며, 당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반공자유주의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민족국가 수립의 이념적 기초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공화정 출현과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동시성, 한반도의 인종적 특수성 그리고 국가주의 성향과 반제국주의 투쟁의 전통으로 인한 반공주의, 민족개량주의, 좌파 성향의 계급지향적인 민족주의, 경제민족주의 등으로 나타났다.

역대 정부는 시대적 상황과 정권의 필요에 따라 민족주의적 요소를 적절히 활용해 왔다.  

건국 초기에는 독립 운동의 역사와 결부된 반일 민족주의적 요소를 유지했다.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시절에는 반공주의에 기반을 두었지만, 대중의 민족주의적 열정을 경제 발전과 조국 근대화를 위한 산업화로 지향하는 일종의 국가주의적 이념과 혼합하여 국민동원을 위한 통합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를 적절히 구사했다.

그러나 서구 민족주의가 겪어왔던 “위로부터의 민족주의, 아래로부터의 민족주의, 밖으로의 침략적, 팽창 민족주의, 개방된 협조적 민족주이”라는 4단계와는 다르게 한국의 민족주의는 “밖으로의 침략적, 팽창 민족주의” 단계는 찾아볼 수 없고,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의 민족주의”단계는 동시에 중복해서 나타났다.

1970년대 대외적 종속 탈피를 내용으로 벌인 일부 재야 세력의 민중민족주의 운동과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1980년대의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면서, “민족 고대”, “애국 한양” 등 대학생 중심의 반미 및 통일 운동을 결합한 좌익 민족주의 운동이 그 예이다.

여기서 반미 감정으로 민족주의 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은 평양 정권의 주체사상과 한국의 민족주의가 통합되는 현상이며, 한국판 주체사상이라고 보는 미국 의회의 진단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탈냉전 시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반공주의에서 일정 정도 탈피하였으며, 문민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순수한 민족주의의 가치를 고양했다.

한국의 민족주의의 특징은 민족주의를 도덕주의적으로 사유 (思惟)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자신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만이 민족주의라고 인식한다는 뜻이며, 이런 인식 때문에 민족주의는 절대선 (絶對善으로 비치게 된다.

이 성향은 제국주의 지배를 받았던 제3세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한국은 일제의 강점과 한반도의 적대적 (敵對的) 분단 체제의 지속으로 더욱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 평양 정권의 민족주의 >

평양 정권의 민족 개념과 민족주의는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 주체사상의 체계화, 남북 관계 와 통일문제 그리고 국내외적 상황에 따라 시기적으로 변화해 왔다.

공산주의 이론에서 민족은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생산력이 국제적 분업을 확대시킴으로써 소멸될 운명으로 보았으며, 사회 현상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는 계급투쟁의 시각에서만 파악함으로써 레닌에 이르기까지는 민족에 대한 일정한 개념은 없었다.

민족 개념은 러시아 10월 혁명이후, 스탈린에 의해 비로소 그 이론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스탈린은 민족을 언어와 영토, 경제생활 그리고 공통의 문화 속의 영속적인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평양 정권의 민족 개념은 초기에는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중요시한 스탈린적 민족 논리를 대체적으로 수용했으나 1958년에 마무리된 사회주의적 개혁과 60년대 한국의 산업화의 추진으로 경제생활의 공통성의 근거는 사라졌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한민족의 역사성과 함께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로 우리 민족의 현행 상황을 반영하는 민족 개념을 등장시켜, 민족을 핏줄과 언어, 영토와 문화적 공통성에 입각하여 형성된 사회생활의 단위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민족 개념의 수정은 혈연관계를 중심으로 수령에 대한 인민들의 충성과 효성을 이끌어 내려는 정치적 의도와도 관련이 있으며, 이와 같은 도덕규범의 호소력은 김 부자의 권력 승계를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이게 하는 의식 구조화 작업이기도하다.

또한 지도자의 절대 권력의 합리화나 개인숭배를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원천적으로 찾을 수 없으므로 개인숭배의 논리 전개는 민족주의적 상징성에서 명분을 찾으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에 대한 시각도 이와 같은 민족 개념의 시기적 변화와 맥을 같이 하면서 변화하였다.  평양 정권의 1970년대까지의 민족주의 인식은 민족주의 자체를 부르주아 민족주의로 간주하여 배격하는 대신, 사회주의 사회의 민족주의 개념으로 볼 수 있는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중. 소 분쟁의 심화와 함께 평양 정권이 자주노선을 지향하면서 중, 소의 경제 지원의 감소에 따른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교양 사업으로서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의 강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체사상은 가장 철저한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라는 그들의 정의가 말 하듯 주체사상의 본격적인 대두와도 연관된다.

1980년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의 제시와 함께 스탈린적 민족 개념의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삭제하고, 대신 ”언어와 혈연의 공통성”을 강조하면서 핏줄을 민족 구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정했다.

스탈린의 경제생활의 공통성 개념으로는 한반도의 남과 북은 사회주의 민족과 자본주의 민족으로 분리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되면 평양 정권이 주장하는 민족대단결의 통일 이론과도 모순 된다.

따라서 민족 개념에서 경제생활의 공통성 대신 혈연의 강조를 통하여 민족대단결 통일방안의 논리적 기반을 구축하게된 것이다

이처럼 평양 정권 나름의 민족 개념이 정식화된 1980년대의 민족주의는 식민지 국가에서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면서, 1986년에는 기존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대신 “우리민족 제일주의”를 공식화하는 변화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주체의 민족관으로 정식화된 우리민족 제일주의는 1990년대 들어 경제 침체와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에 따른 체제 위기를 극복하기위한 이론적 방편으로서, 또한 지구촌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1991년, 평양 정권은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진정한 민족주의와 배치되는 사상이며, 민족을 계급에 우선하는 개념으로 규정함으로써 민족주의의 긍정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기초는 애국심의 공유를 전제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애국애족은 공산주의를 진정한 민족주의와 연결시켜주는 원동력이라는 논리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접목의 정합성 (整合性)을 강조했다.

우리민족 제일주의 주창과 때를 맞추어 민족 문화의 우수성과 민족의 자부심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으며. 이 무렵 이조실록 (李朝實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사 등을 전문 번역하여 보급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1993년~1994년에 고구려 동명왕릉, 고조선 단군왕릉, 고려 왕건릉을 발굴, 개건하고 평양을 민족의 성지로 규정하면서 평양 중심의 민족사적 정통성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평양 정권의 이러한 민족주의의 변화는 한반도 및 주변 상황의 변화에 맞게 체제 유지에 긴요한 체제의 규범적 당위성을 강화하는 한편, 한국 내 적화 혁명에 의한 통일노선의 어려움에 따른 새로운 통일 이념의 모색의 필요성이 민족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강조하게 된 이유가 될 것이다.

< 우리의 선택 >

현재 지구촌은 탈냉전 및 세계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민족주의가 국가이념으로 급격하게 대두되고 있다.

이것은 민족국가로 구성된 세계 체제가 국제주의에서 이탈하면서 민족 간의 갈등을 심회시키고 억제되었던 민족 문제가 전면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광복 후 한반도의 근대적 민족국가 (Nation state)를 형성하지 못한 채 적대적 (敵對的) 분단 체제 속에서 민족문제의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남과 북의 민족주의에는 유사점과 차이점도 공유하고 있다.

단일 민족의 혈연적 동질성과 오랜 역사와 빛나는 문화 등 문화 민족주의적 민족의식과 태생적으로 식민지 해방국가의 민족주의 특성인 저항 민족주의적 특징을 함께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민주화와 세계화를 겪으면서 터놓은 민족주의로 나가는 반면, 평양 정권은 탈냉전 이후의 고립 상황에서 통치 원리로서의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오히려 저항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민족주의는 사회의 온갖 갈등을 해소하는 통합 원리의 기반일 뿐만 아니라, 계층과 지역 및 세대 간 갈등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며, 민족의 개념을 통하여 국민적 화합과 통일을 대비한 내부 역량의 강화에도 긍정적으로 작용 하게 된다.

오늘날 선진국들은 이미 자유민주주의의 한계와 복지국가의 부작용을 극복할 수 있는 체제 수립의 구상에 착수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사적 발전 과정에 동참하여 한국의 선진화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래의 낡은 이념과 체제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민족국가를 형성하는 “통일국가”의 이념적 좌표를 설정해야 할 것이다.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에서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국의 좌파 민족주의는 몰락하였으나, 선진 사회로 가는 비전 없이 배타적이고 오직 민족의 주체성과 “우리민족끼리”라는 허황한 구호로 통일에만 집착했던 좌파 민족주의의 위험성 때문에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또한 확산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대중적인 감정은 민족주의에 대한 친화성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민족주의는 통일국가 이념에 부합되며, 한, 중 일 과의 지정학적 관계에서도 개방적이고 균형 잡힌 다양성 있는 민족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초일류 국가를 만든 미국의 민족주의 의식의 원천은 정치적 사고의 동질성이며, 한국에서처럼 같은 과거와 혈연에서 근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공통 미래 (Common Future)” 지향에 의미를 부여하며, 민족주의 의식을 결집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공유에 바탕을 둔 이 같은 민족주의의 확대 재생산 의식이야 말로 오늘의 미국을 떠  받치고 있는 힘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터득해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민족주의는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에 배타적인 태도를 돌출하게 된다.  과거의 쓰라린 역사를 통해 구축한 이슬람 민족주의와 이집트 민족주의나 패배의식에서 출발한 “우리민족끼리”의 구호로 포장된 위선적인 김일성 민족주의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적 민족국가의 형성을 목표로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한국의 민족주의는 “보다 나은 미래 (Better Future)”를 여는 개방 민족주의라야 하며, 국제사회와 교류하고 더불어 살면서 세계와 함께 공존과 평화를 도모하는 “대한민국 민족주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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