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1일 토요일

최근의 러,北관계 (The Recent Russia-North Korea Relations)



The Recent Russia-North Korea Relations
Abstract:
 

Until the end of the Cold War, a friendly alliance was maintained between the Soviet Union and North Korea.
 

After the Korean War, the USSR helped North Korea's post war reconstruction, while keeping a check on Beijing-Pyongyang relations.
 

Since the end of the Cold War, Moscow has exercised a balanced diplomacy on the peninsula, leaving Pyongyang with little choice but to adjust its relations with Moscow.
 

As economic cooperat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expanded, political relations also gradually recovered.
 

The first round of talks on a new security treaty began on January 21, 1997.
 

Both sides agreed to leave out a clause on automatic military intervention, which had been a key issue in negotiations, as well as a clause expressing Russia's support for Pyongyang's unification formula, known as the Koryo Confederation.
 

The two sides initiated the Treaty of Friendship, Good Neighborliness and Cooperation in Pyongyang on March 17, 1999, and it was officially signed in February 2000.
 

The new security treaty transformed bilateral ties between Russia and North Korea from an ideologically-based political and military alliance to an economic partnership.
 

The construction of a natural gas pipeline across Russia and the two Koreas, through such tri-lateral construction projects, Russia stands to gain in its endeavor to develop the Russian Far East.
 

Moscow also seeks to assume the role of mediator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On the North Korean nuclear problem, Russia aims at enhancing its status by mediating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China, at the same time, checking their dominance in the region.
 

Moscow also strives to exert its influence on North Korea and create a new political and economic order that would serve its own interests in Northeast Asia.
 

Since the second term of presidency of the Russian president B.B. Putin, its Asian-oriented policy has been increasingly embodied.
 

This seems to be a result of that Russia has reaffirmed its strategic value about the North Korea and the regime in the midst of the forces being settled of the United States and China forces composition in the Asia-Pacific region.
 



최근의 러ㆍ北관계
 

탈냉전 이전 시기까지 러시아와 北은 전통적인 우호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러시아는 중ㆍ北 간의 관계가 긴밀화되는 것을 견제, 北을 지원했다.
 

탈냉전 이후에는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균형외교를 구사함으로써 北은 새로운 러ㆍ北 관계 설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경제협력 관계가 본격화되면서 러ㆍ北 간의 정치적 관계도 차츰 회복되어갔다.
 

1997년 1월부터 신 조약 회담이 시작되면서 핵심 쟁점이던 자동군사개입 조항이 폐지되고, 고려연방제 지지조항을 삽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2000년 2월 러ㆍ北 우호선린협조 조약이 정식 서명됨으로써 러ㆍ北 관계는 이념에 기초한 정치ㆍ군사적 동맹관계에서 벗어나 경제협력의 파트너로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러시아의 뿌띤 (В В Путин)의 재집권 이후 러시아의 “아시아 지향성”정책이 구체화되는 방향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동북아 지역의 미ㆍ일 군사안보관계의 강화에 때 맞춰 러시아는 중ㆍ일의 해양영토 분쟁에서 중국 지원의 접근을 하며, 5월말 중ㆍ러 동중국해상 해군연합연습도 계획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北 정권이 중국 편중의 대외관계구조를 새로운 러ㆍ중 등거리 외교를 대안으로 인식하는 징후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른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징이 다층구도의 모습을 띠면서 러ㆍ北의 전략적 상호접근으로 지역의 불확실성이 깊어지는 양상이다.
 

특히 러ㆍ北의 접근에서 에너지 분야의 협력이 두드러지고 있다.
 

KOTRA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는 2013년 3,689만 달러의 석유를 北에 수출했다. 이는 전년 대비 58.5%가 증가된 물량이다.
 

北은 중국 일변도의 대북 석유 및 식량 지원을 탈피하면서 수입 구조를 다변화하려는 대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ㆍ北은 현재 답보상태에 있는 양측의 교역량 (1억 달러 규모)을 2020년까지 이의 10배인 10억 달러로 확대하는데 합의했다.
 

이 밖에도 양측은 2013년 9월 극동 하산역과 나진항 사이 철도 54km 구간도 개통했으며, 러시아는 소련시기 北의 대러 전체 채무 110억 달러 가운데 90%를 탕감해주었다.
 

러시아는 남ㆍ北ㆍ러 가스관 연결사업과 같은 3자 협력 프로젝트를 통해 러시아의 극동지역 개발을 도모하는 실리를 취하는 한편, 남북 간의 중재자 역할을 취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북핵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는 6자 회담의 틀 내에서 미국과 중국을 중재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강대국의 위상을 확립하고, 北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동북아에서 자국의 이해에 부합하는 정치적ㆍ경제적 질서를 만들려는 입장이다.
 

러시아는 시리아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여준 것처럼 소련 붕괴 이후 국제사회에서 그들의 추억 속에 살아있는 옛 러시아제국의 야망의 인상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보는 앞에서 담대하게 강행한 크림반도 합병뿐만 아니라, 수 조 달러로 추정되는 이 지역 해양영역의 석유 및 가스 매장량의 해저 탐사권도 획득했다.
 

냉전체제의 붕괴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기반의 러ㆍ北 공동위협 인식이 소멸되었으며, 고르바초프의 신사고가 한ㆍ소수교로 이어져 러시아의 北 정권에 대한 영향력이 상실되는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는 이와 같은 한반도전략의 실패라는 러시아 외교사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제 동아시아 정세변화의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러ㆍ北의 새로운 접근은 미ㆍ중의 세력구도가 정착되고 있는 아ㆍ태지역에서 러시아가 北 정권과 북한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재인식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여기에는 김 정은 체제의 北 정권과 중국과의 관계의 유동성 증가도 러ㆍ北 접근의 중요 요인으로 작용했을 개연성이 지적되고 있다.
 

중국이 비핵화를 위해 北 정권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北의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는 北이 바라는 새로운 옵션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극동개발을 통해 아ㆍ태지역의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이해 (利害)와 과도한 대중국 의존도를 탈피하려는 北의 입장이 조화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략적 공통점 속에서 추진되고 있는 러ㆍ北의 상호접근은 앞으로 외교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을 공산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MUSIC
The Blue Danube Waltz
Herbert von Karajan conducts
 
 

2014년 6월 17일 화요일

프런티어 이야기 (Frontier Story)


Frontier Story
Abstract:
 
A frontier is the political and geographical areas near or beyond a boundary. The word "frontier" also means a region at the edge of a settled area, especially in North American development.
 
It is a transition zone where explorers, pioneers and settlers were arriving. That is, as pioneers moved into the "frontier zone". they were changed the encounter.
 
A frontier can also be referred to as a "front". The United States' 1893, one change was that unlimited free land in this zone was available, and thus offered the psychological sense of unlimited opportunity.
 
This, in turn, had many consequences such as optimism, future orientation, shedding of restraints due to land scarcity, and wastefulness of natural resources.
 
Throughout American history, the expansion of settlement was largely from the east to the west, and thus the frontier is often identified with "the west".
 
By the beginning of 1849, word of the Gold Rush had spread around the world, and an overwhelming number of gold-seekers and merchants began to arrive from virtually every continents.
 
The largest group of forty-niners in 1849 were Americans, arriving by the tens of thousands overland across the continent.
 
The spontaneity, sense of fun, exaggeration, fierce individuality, and irreverence for traditional Eastern values in frontier humor reflect the optimistic spirit of pre-Civil War America.
 
"The gold was available to anybody with a pick and a pan," says a historian. "There was no license you had to buy.
 
There was no central authority. This was one of the most remarkable examples of the democratization of the economy.
 
It was open to all Americans, as our national myth says it should be."
 

프런티어 이야기
 
미국 역사에서 프런티어 (Frontier)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서부를 의미했으며, 정확히는 1 평방 마일 당 거주하는 사람이 2명이 되지 못한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서부가 갖는 의미는 중요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서부로 몰려가는 과정에서 신분과 경제력의 차이는 있을 수 없었고, 모두가 평등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건강한 정신과 태도가 서부 개척이라는 역사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의 미국 역사는 “황야 (Wilderness)"라는 개념의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인 대서부 (The Great West)로 향한 식민지 정복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인의 서부 이주의 절정은 1849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어 더욱 많은 백인들이 서부로 몰려든 때를 말한다.
 
“Forty-Niner (캘리포니아로 몰려간 사람)”라는 뜻의 단어가 영어사전에까지 올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1776년 미국이 독립하기 전까지 미국인들은 북쪽 메인주에서 남부 조지아주까지 13개 주를 형성하였다.
 
그 후 애팔래치아 산맥 (The Appalachians)을 넘어 미시시피강을 건너 계속 서부로 진출했으며, 19세기 초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프랑스령이었던 미국 남부의 루이지애나 (Louisiana, 2,144,520 평방km)를 사들였다.
 
이 땅은 한반도의 거의 10배의 크기이며, 오늘날 미국의 15개 주 전부 또는 일부가 포함된다.
 
미국 사학자들은 미국 역사의 중심축은 서부의 역사이며 서부에 펼쳐 있는 광활한 자유의 땅 (Free land)에서 미국 민주주의가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서부 개척을 통해 미국의 고유의 문화가 서서히 정착되었으며, 개인주의, 낙천주의, 애국심 등과 같은 미국 고유의 국민성도 이때에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서부는 동부인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출구 역할도 했으며,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경제적 평등과 사회적 유동성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이런 프런티어 생활의 특성은 힘과 정력의 과시와 실질적이고 창조적인 마음으로 물질적 사물에 대한 광범위한 지배욕구로 선악 (善惡)양편에 대응할 개인주의와 자유로부터 얻어지는 호탕한 기개 등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은 프런티어 사관 (史觀)을 미국인의 문화적 기질에 국한시켜보면 이 특성에 공감할 수 있다.
 
반면에 부정적으로 보자면, 국제적으로 난폭하게 구는 카우보이 기질과 그 바탕이라 할 수 있는 인종차별주의나 엄청난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물질주의적이고 소비주의적인 삶은 확실히 미국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노다지”를 잡으려는 강력한 한탕주의 속성이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 (American Dream)”으로 미화되어 왔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프런티어 사관은 무엇보다도 백인 지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역사라는 비판과 더불어 서부 개척의 부작용, 특히 인디언들의 대량 학살을 간과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492년 무렵 북아메리카에는 400~500만 명의 인디언이 살고 있었지만, 1900년에 그 인구는 2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넓은 지역을 점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그처럼 폭력적인 단절을 경험한 경우는 역사상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백인들이 저지른 대량 학살이었다.
 
민주주의도 서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동부에서 이식되었고 또 그것은 유럽에서 온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프런티어 사관은 오늘날 미국의 문명을 이해하는 주요 담론의 축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사학자들은 지난 300년 동안 미국인들의 삶의 지배적인 양상으로 바로 “팽창”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런 측면에서 미국의 강력한 외교 정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제 이 “팽창”은 세계를 향하기 시작했으며, 이 기운은 대중문화를 통해서도 표출되었다.
 
서부영화의 탄생은 서부의 몰락, 즉 프런티어의 종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프런티어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기에 서부영화가 서부를 대신하기 시작하여 미국적 성격을 계속해서 형성해 나가고 있다.
 
1926년부터 1967년까지 40년 넘게 할리우드는 다른 어떤 종류의 영화보다 많은 서부영화를 제작했다.
 
서부영화는 텔레비전까지 점령했다. 1950년대 중후반 시청률 10위까지의 프로그램 가운데 웨스턴 드라마는 7개까지를 점유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NBC가 1959년부터 방영한 “보난자 (Bonanza)였다.
 
웨스턴 소프 오페라 (Western soap opera)로 불린 보난자는 무려 14년 동안 일요일 저녁에 고정 편성되는 불후의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미 국민의 서부 개척 시대에 대한 동경에 힘입은 웨스턴물은 “생동하는 미국”의 가치를 걸고 “뉴프런티어 시대 (New Frontier era)”를 선언한 케네디 시대의 미 국민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1958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을 우주로 쏘아 올리자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은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수학과 과학을 새로운 우선순위로 삼고, 인터넷 개발에 착수했다.
 
케네디와 존슨 시대에는 우주의 정복이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엔 SF (Science Fiction, 공상과학소설)영화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술적 면에서는 대조적이지만, 서부영화와 SF영화는 프런티어 경험을 찬양하는 점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서로 유사성을 갖는다.
 
실제로 서부영화의 위력이 사라지면서 SF영화가 그 주제와 상황, 모티프 (動機)의 상당 부분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이젠 인터넷이 새로운 프런티어가 되었다.
 
그리고 거친 개인주의 미국인들은 육혈포 (六穴砲)와 동등한 동시대 무기인 고속 모뎀 (Modem)으로 무장하고 최첨단 문명의 바깥에 외로이 서있는 변경 개척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MUSIC
Hungarian Dance No.5
Johannnes  Brahms
Tomomi Nishimoto conducting
 

2014년 6월 11일 수요일

중국의 안보 계산법 (China's Security Calculus)

China's Security Calculus
Abstract:
 
Recent reports that China has not exported any crude oil to North Korea for the last three months certainly raise the possibility.
 
To assess the situation accurately, one must first understand Chinese security calculations about the Korean peninsula.
 
 
These calculations are a product of Chinese national interests and concern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ll colored with historical and political considerations.
 
The China's number one core interest is to maintain its fundamental system and state security; next is state sovereignty and territorial integrity; and third is the continued stable development of the economy and society.
 
The core interest suggests that China's security interests would be best served by maintaining good relations with both North and the ROK, while forestalling development of any grand coalition of the ROK, United States and Japan that could contain China and adversely affect Chinese economic development.
 
Yet, for much of the 2000s, China pressed historical and territorial issues that would antagonize ROK. China asked UNESCO to declare ancient tombs from the kingdom of Koguryo in China as world heritage sites.
 
Simultaneously, the "Northeast Asia History Project," a Beijing-funded endeavor, tried to establish that the Koguryo kongdom was, in fact, a part of Chinese culture.
 
 
It is believed that the project was meant to forestall any future attempt by a reunified Korea to claim Chinese territory with substantial ethnic Korean populations.
 
However, it might have been intented to signal to Pyongyang, and possibly Seoul, that instability on the peninsula could lead to Chinese intervention-justified by historical claims to the northern portion.
 
Sino-ROK relations have improved, since these 2010 incidents. Economic ties between the two states were never disrupted, and the constant stream of commerce limited the impact of Chinese reticence.
 
China remains the ROK's most important trade partner-serving as both the largest exporter of goods to the ROK and as its largest export market.
 
 
Efforts to negotiate a Sino-ROK free trade agreement reflect this extensive economic relationship.
 
Given the importance of the Korean peninsula in China's security calculations, China naturally seeks to influence security developments there.
 
 
And how the political situation develops in the wake of Kim Jong-un is doubtless a major concern.
 
For China, the ideal outcome in a post-Kim Jong-un world, arguably, would be for the Korean peninsula to remain divided, but with a North Korean leadership that was more amenable to implementing economic reforms.
 
Moreover. a more economically capable North Korea would be a potential trading partner, giving China greater economic leverage against the ROK.
 
If China cannot secure a compliant, relatively reformist North Korea, it would likely strive to create a neutralized, reunified Korean peninsula under Seoul.
 
Chinese actions such as the cessation of oil exports may be a signal of such a major move.
 
 
Xi Jinping may seize the opportunity to demonstrate new thinking in Beijing, or he may be reluctant to risk such a radical break.
 
But as the region awaits the prospect of a North Korean nuclear test, how China responds may provide an indication of future trends.
 
 
 
중국의 안보 계산법
 
중국이 지난 석 달 동안 北 정권에 원유 공급을 하지 않았다는 최근의 보도는 그 가능성을 확실히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중,北 관계 악화를 속단한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다. 그 이유는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안보 계산법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계산법은 중국의 역사적, 정치적 고려에 입각한 국익과 중국공산당의 관심의 산물인 것이다.
 
<중국의 안보 개념>
 
중국의 국가안보는 여러 가지 “핵심 이익”에 뿌리박고 있다. 
 
이 핵심 이익은 2009년 중국의 정치가이며 직업 외교관인 외교수석위원 다이 빙궈 (戴 秉國, 1941~)가 공식 발표했다.
 
중국의 핵심 이익은 첫째, 기본적인 시스템과 국가안보의 유지, 둘째 국가주권과 영토보전, 그리고 셋째는 계속적인 경제 및 사회의 안정적인 발전이다.
 
이 특성은 중국공산당의 권력 유지 능력을 최우선시 함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에서 국가와 당의 두 기둥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실제로 국가안보의 주요 요소는 중국의 국제적 관심사의 수호자로서의 중국공산당의 자격에 도전하는 적이나 간섭세력에 맞서는 당의 능력이다.
 
<최근의 안보 진전>
 
중국인의 관점에서 국가안보는 중국공산당의 계속적인 지배를 요구하고 있으며, 중국의 동북아 및 한반도의 안보 평가는 여러 가지 현실을 감안한다.
 
첫째, 한국은 비록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지만, 중국의 주요 무역 파트너이다.
 
둘째, 北 정권은 중국의 동맹국이지만, 경제적 장애자이다.
 
셋째, 北 정권은 중국의 충고나 지시에 순종하지 않는다.
 
넷째, 미국은 일본과 한국 내 미군기지의 활용으로 지역 내 주요 안보 존재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 핵심 이익이란 중국의 안보 이익은 北 정권과 한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중국을 봉쇄하고 중국의 경제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미,일의 대연정은 제압 대상임을 시사한다.
 
2000년대의 대부분 기간, 중국은 한국의 반감을 살 많은 역사 및 영토문제들을 주장했다.
 
중국은 중국 내의 고구려의 고대 무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것을 유네스코 (UNESCO) 에 요청했다.
 
정부투자로 이뤄진 “동북아시아 역사프로젝트”는 사실상 중국문화의 일부로서의 고구려왕국을 형성하는 시도였다.
 
이 계획은 장차 한반도의 통일한국이 실질적인 조선족 인구의 중국영토에 대한 주장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반도의 불안정이 중국의 개입을 유발할 수 있음을 한국과 北 정권에 보내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센카쿠제도 (尖閣諸島, 중국명 釣魚島)와 남중국해에 대한 주장들도 이와 유사한 주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른 영토분쟁은 2006년 중국이 이어도 (離於島 또는 波浪島)를 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 (EEZ)을 근거로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함으로써 제기되었다.
 
이어도는 한중 잠정 조치 수역 내에 있는 최고점이 해저 -4.6m, 남북 길이 1,800m, 동서 길이 1,400m, 면적 약 2 평방km의 수중암초로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우리 영토다.
 
2011년 중국이 이 분쟁 인근수역에 3척의 선박을 급파하고, 최근 이어도를 포함한 영공을 방공식별구역 (ADIZ)으로 선포함으로써 이 이슈는 더 첨예화되었다.
 
<중국의 관계개선 노력>
 
그러나 박 근혜 정부와 중국의 시 진핑 (習 近平)정권의 출범 이후의 한,중 관계는 밀월을 구가하고 있다.
 
양국의 경제관계는 중단하지 않고 있으며, 이 지속적인 상업의 흐름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로 한국에 가장 큰 상품을 수출하고 또한 가장 큰 수출시장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한,중 FTA 협상 노력이 이런 광범위한 경제관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고구려 현안에 침묵할 뿐 아니라, 한국의 비위를 맞추는 노력도 하고 있다.
 
중국의 안 중근의사의 박물관 건립 결정은 일본을 희생하면서,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하기위한 노력이다.
 
중국은 지금이 바로 일본, 특히 아베 총리의 일본과의 두 나라의 공유 의혹 문제를 조장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더욱이, 한,일 양국 간의 긴장 및 유도탄 방어와 같은 분야에서의 의미 있는 군사협력의 알력이 심화된 상태가 아니라면 마지막 순간에 실패한 한,일 정보협정의 체결은 현재 진행 중임을 반영한다는 해석이다.
 
동북아의 지리적 현실 때문에, 조기경보를 포함한 한,일 양국의 지능정보 공유의 무능력은 유도탄 방어의 효율성을 크게 훼손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주요타격전력인 탄도탄에 대한 중국의 큰 투자가 분명한 혜택을 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의 선포는 분명히 한국의 반감을 사게 했다.
 
한국은 중국이 주장하는 이어도 영공에 전투기를 발진시켜 도전했으며, 국적운항사에 이 지역에 진입하는 상용 (商用)비행은 중국군 당국에 통보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한 한국의 자체 방공식별구역은 이어도 이상으로 확장되었으며, 순찰도 강화했다.
 
그러나 중국의 반응은 조용했다. 한국은 지금 항공사에게 비행계획을 중국에 알리도록 결정했다.
 
이것은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으며, 한,일 및 한,미,일 안보협력이 훼손되어가는 경우에만 중국은 한국에 화해적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중국의 온화함을 北 정권 비난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北 인권에 대한 유엔의 꼼짝 달싹할 수 없는 400쪽 분량 보고서를 중국은 실제로 집요하게 부정적으로 대응했다.
 
<한반도와 중국의 안보>
 
한반도는 중국의 안보에 중요하기 때문에 중국은 자연히 안보에 관한 영향력 추구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김 정은의 등장에 따른 정치적 상황의 진전은 중국의 주요 관심사가 된다.
 
중국이 바라는 김 정은 이후 세계의 이상적인 결과는, 틀림없이, 한반도가 분단된 상태로 남는 것이지만, 北이 더 적극적으로 경제개혁을 실천하는 것이다.
 
느슨한 중앙집중식 계획 시스템과 최소한의 시장개혁 조치는 北 정권의 극단적인 빈곤을 완화시켜주며, 국내 붕괴와 난민 위기의 가능성도 가소시켜 줄 것이다.
 
더욱이, 경제적 역량을 갖춘 北 정권은 중국의 잠재적인 무역 파트너로서 중국의 한국에 대한 큰 경제적 활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결과의 가능성은 있을 상 싶지 않다.
 
 
그것은 1956년부터 시작된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제거된 모든 북한지역 사람들은 김 씨 일가 외의 사람이면 누구라도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이 순종적인 상황을 확보하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北 인사들은 한국에 의한 중립적인 한반도의 통일한국 수립의 노력을 할 수 있다.
 
한반도 통일이 통일과 통합 단계에서 대규모의 고비용을 수반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엄청난 비용은 한국의 지출과 예산뿐만 아니라 외부원조와 자금조달의 조정도 요구한다.
 
막대한 외화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은 이에 걸 맞는 역할을 기꺼이 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일과 동맹국으로서의 통일한국의 수립은 중국의 최악의 시나리오가 된다.
 
이 상황에서, 중국은 자체 영역에 인접해 있으며, 엄청난 군사력을 휘두를 수 있는 아시아의 3대 경제대국에 의해 봉쇄될 수 있다.
 
또한 중국지역에 근접해 기반을 둔 미군의 잠재적인 정보수집의 경우라 하더라도 확실히 중국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나아가, 중국으로서는 동아시아의 악성 모델이 될 수 있는 지속적인 NATO의 확장과 맞닿을 수 있다.
 
<전망>
 
중요한 것은, 중국의 계산법이 北 정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원유 수출의 중단과 같은 중국의 조치는 이런 주요 움직임의 신호일 수 있다.
 
일상적인 고려사항으로 볼 때, 시 진핑은 현실을 중국의 신 사고를 보여주는 기회로 삼을 수 있거나, 또한 이런 급진적 위험을 주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북아 지역이 北의 핵 시험의 가능성을 예상하고 있는 이 때, 중국의 대응은 미래 동향의 징후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MUSIC
Toccata Fugue
J.S.Bach
Violin: Vanessa Mae
 

2014년 6월 1일 일요일

北 정권의 딜레마 (North Korea's Dilemma)



North Korea's Dilemma
Abstract:
 

The specifics that pertain to North regime have made it the world's most exclusive and rigid regime since the mid-20th century, and induced utter crisis for the nation and its dire economy.
 

North Korea has been almost completely isolated since the collapse and transformation of socialist states in the late 1980s.
 

Since the 1990s, it has suffered from a widespread food shortage due to chronic economic crisis.
 

North Korea has continued to face comparable external and internal circumstances in the new century, which have heightened pressure for change and reform.
 

In particular, while the regime deals with the isolation, it must also watch anxiously as other socialist countries such as China and Vietnam align with international order by reforming and opening their respective systems.
 

Ironically, North Korea remains steadfastly opposed to any reform or opening despite its chronic crisis.
 
 
Rather, the regime seeks to overcome economic hurdles and assure its survival by consolidating the existing system under the banner of the "strong and prosperous nation" campaign.
 

In this manner the regime is struggling to emerge from international isolation and regain its economic stride, but it is well aware of how desperate conditions are, and knows that failure could mean losing everything.
 

The North has repeatedly indicated interest in reform-only to waver or roll back changes, despite the encouragement of China, which embraced capitalism from the late 1970s.
 

There is lots of knowledge and interest in economic reform at senior levels in the North Korea, but it is always stymied by the security imperative.
 

The fundamental challenge is the North's policy of developing nuclear weapons and the economy in parallel; "a contradiction reified as doctrine".
 
 
Overall, Kim's attitude toward economic reform in cooperation with China remains a mixed bag.
 

Pressure for change within the system is growing, and competition for scarce foreign investment is intense.
 

So what should we expect from Kim ?
 
 In the short run, it will, probably, be more of the same: diplomatic maneuvers aimed at extracting foreign aid, stubborn unwillingness to initiate domestic reforms and, of course, unwavering commitment to keeping and, if necessary, advancing the nuclear weapons program.
 

All these policies might be annoying and even dangerous to the outside world, but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North's leaders, such things make perfect sense, so one should not expect them to reverse these policies.
 

The North has no serious reason or intention to talk about
denuclearization. They believe that nuclear arms are the major safeguard against foreign invasion and/or intervention into a domestic crisis.
 

Why, then, is the regime hesitant to take the path towards policies of active reform and opening?
 

First, the regime rejects any alternative measure or policy that may weaken its hold on power or increase even slightly the risk of collapse.
 

Second, the North greatly fears the uncertainty and instability that may arise from a policy of reform and opening, even if external and internal environments were to allow easy implementation of such measures.
 

Third, North Korea displays a strong conviction that it can overcome the current crisis by playing the nuclear card. This puts it in a dilemma.
 

A fundamental solution to overcoming North's serious economic challenges lies in the introduction of reform policies like those implemented by other socialist states in the post Cold War era.
 

Nonetheless, North Korea has heightened its control over society due to its fear that reform policies may lead to the collapse of the regime.
 

This has forced North Korea to choose between regime survival and reform policies. Time will tell which direction the regime will ultimately choose.
 
 

北 정권의 딜레마
 

北체제가 갖는 사회주의 체제의 보편성과 北 정권의 특수성은 20세기 중후반 이후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경직된 체제로 만들었으며, 경제위기를 포함한 체제의 총체적 위기를 초래케 했다.
 

北은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사회주의권의 체제 붕괴와 전환으로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최악의 경제난과 식량난 등으로 대기근을 겪게 되었다.
 

北 체제가 대내외적으로 경험해 왔던 이런 상황은 금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北 체제의 변화와 전환에 대한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국제적 고립이 심화된 상태에서, 중국과 베트남 등의 사회주의 국가도 개혁ㆍ개방을 통해 시장중심의 국제질서에 적응해 가고 있는 현실에서 北의 조바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하지만 北은 역설적으로 개혁ㆍ개방을 거부한 채 “강성대국”건설을 내걸고 체제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또한 국제적 고립과 심각한 경제난 해결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이에 실패할 경우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과 절박감도 함께 느끼고 있다.
 

北은 자체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나 자립경제 노선만으로는 직면한 식량난, 에너지난, 외화난 등 경제난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지만 이런 인식이 곧 개혁ㆍ개방으로 나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재 北은 외부지원이 절실함을 인식하면서도 폐쇄적이고 경직된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모순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지금 北 정권이 직면한 딜레마는 위기로 치달은 경제난을 극복하고 체제를 생존시키기 위해서는 현행 사회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하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이를 실천할 때 나타날 제반 요소들은 北의 지도부와 체제 생존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요인으로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北은 외부의 정세 변화와 무관하게 오히려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려는 전략으로 일관해 왔다.
 

변화에 대한 대내외적 압박 요인들에 대해서는 체제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면서 정책적 우선순위만을 조정하는 방법으로 “그럭저럭 버티기 (Muddling through)"를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체제 유지 전략으로는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현재의 北 상황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北 정권은 외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 때로는 주변국을 압박하고 때로는 유화적으로 접근하기도 했다.
 

이제껏 北은 이러한 양면전술을 통해서 경제지원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더욱 심화되고 확대되고 있다.
 

이 위기 상황은 北 정권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압박하고 있지만, 北이 적극적인 개혁ㆍ개방의 길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 北은 체제 유지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그 어떤 대안이나 정책도 거부하고 있다.
 
 
나아가 현 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둘째, 北은 개혁ㆍ개방을 추진할 수 있는 대내외적 환경이 조성되더라도 개혁ㆍ개방의 과정에서 발생할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김 정일 체제의 경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혁ㆍ개방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곤 하였다.
 

김 정은 체제에서도 권력의 안정적 장악과 체제 유지를 가장 우선시하면서 체제 붕괴로 이어질 개혁ㆍ개방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셋째, 핵문제를 통해서 자신이 직면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北으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었다.
 
 
즉, 핵 외교로 주변국들과의 협상에서 원유와 식량 등을 외부 국가들로부터 지원받아 개혁ㆍ개방 없이 자신이 원하는 목표 달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北의 두 차례의 핵 시험에 대하여 유엔과 국제사회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대북제제를 결의하고 실행함으로써 北의 경제난은 오히려 더 심화되고 확대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왔다.
 

이런 상황은 2012년 4월 헌법을 개정하여 핵보유국 지위를 명기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중국의 신화통신은 2010년 8월의 중ㆍ北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 주석도 개혁ㆍ개방이 시대의 흐름이자 국가 발전을 위해 반드시 걸어야 할 길임을 강조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北은 개혁ㆍ개방이 곧 체제 붕괴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사회통제를 강화하여 왔다.
 

결국 北 정권은 체제생존과 개혁ㆍ개방이라는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런 딜레마 속에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주목된다.
 

김 정일 사후 김 정은 체제의 확립 과정이 진행 중이고, 강성대국 진입의 대문을 활짝 열 것이라고 공언했던 201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제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北 정권이 직면한 이러한 딜레마가 앞으로 北 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MUSIC
Nabucco-Hebrew Slaves Chorus
Ver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