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War II and the Atomic Bomb
Abstract
Visiting the National World War II Memorial in Washington D.C. is a sobering experience.
The cascade of gold stars adorning the walls are adepiction of the 400,000 American service members who died in both the Pacific and European theaters of war.
U.S. government wartime casualty assessments provide a chilling reminder of the human cost of an invasion had President Harry Truman decided not to drop the atomic bombs on Hiroshima and Nagasaki.
The lowest number of estimated fatalities appears to be 267,000. Other assessments go as high as 500,000 or 1 million fatalities, with many more that number being wounded.
As horrendous as these predictions were, they may well be underestimates.
Post-war access to captured Japanese documents and senior Japanese military leaders indicate Japan had greater military forces available to defend the homeland than U.S. officials predicted.
Truman said his goal was to “shorten the agony of war, in order to save the lives of thousands and thousands of young Americans.”
U.S. public outcry had Truman instead opted for an invasion, prolonging the war and increasing casualties, when it became known another option had been available.
Truman in his memoir, wrote that after Japan rejected another plea for surrender, he had no qualms about his decision to drop the bombs “if millions of lives could be saved...I mean both American and Japanese lives.”
It has been suggested that the devastation caused by the 1945 bombings led both the United States and Soviet Union to refrain from using nuclear weapons during numerous Cold War crises.
Emperor Hirohito announced to his subjects that he based his decision to end the war on the “new and most cruel bomb.
Should we continue to fight, it would result in an ultimate collapse and obliteration of the Japanese nation.”
Given the tenacity of Japanese defense and high civilian fatalities during the battles for Iwo Jima and Okinawa, it is likely that allied invasion of Japan would have caused millions of Japanese casualties.
There are also reports that japanese commanders had orders to execute all 400,000 allied POWs if an invasion of the Japanese homeland occurred.
Had the Pacific War been extended, the Soviet Union would likely have invaded and occupied the northern half of Japan.
Hiroshima and Nagasaki were tragedies, as were all other deaths from World War II.
But the decision to drop the bomb averted the even larger tragedies that would have resulted from a full-scale invasion of Japan.
제2차 세계대전과 원자폭탄
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 (National Mall)내의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 (National World War II Memorial)는 방문하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기념비 벽에 장식된 4,048개의 금별은 태평양 및 유럽 전구 (戰區)에서 전사한 40만 미군을 상징한다.
연합군이 일본 침공을 했더라면, 이 금별은 두 배가되는 인간 비극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미국 정부의 전시 사상자 평가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히로시마 (廣島)와 나가사키 (長崎)의 원자폭탄 투하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침공에 의한 인간 희생의 처절함을 상기케 했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추정 사망자 수는 최저 267,000 명에서 최고 500,000 명 또는 백만 명을 넘으며 이와 더불어 이 수치보다 더 많은 부상자도 산정했었다.
이 끔찍한 예측은 약과이다. 전후 포획된 일본 문서와 일본 군부에 의하면 일본은 미국의 예상을 훨씬 넘는 일본 본토 사수의 대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트루먼은 그의 목표가 “수많은 젊은 미국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전쟁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중의 거센 항의는 트루먼이 전쟁의 연장으로 사상자를 증가시키는 침공이 그 때 다른 옵션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이 선택을 대신하도록 했다.
트루먼은 그의 회고록에서, 일본이 다른 항복의 요구를 거부한 후, 미국인과 일본인 모두 수백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그의 원폭 투하 결심에 조금도 가책을 받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침공에 따른 사상자가 증대하면, 누가 일본의 다른 표적에 원자 무기 사용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는가?
1945년 원자폭탄 폭격에 의한 참해 (慘害)는 수많은 냉전 위기에 미, 소 양국이 핵무기 사용을 자제하도록 했다는 설이 있다.
천황 히로히토 (裕仁)는 일본 국민에게 그의 결심이 “새롭고 가장 잔인한 폭탄의 전쟁으로, 전쟁을 계속하면 그 결과는 궁극적인 붕괴와 일본국가의 소멸이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이오지마 (硫黃島)와 오키나와 (沖繩)전투에서의 일본의 완강한 방어와 높은 민간인 사망자 수를 고려할 때, 연합군의 일본 침공은 수백만의 일본인 사상자를 냈을 가능성은 컸다.
게다가, 전쟁의 확대로 아시아 점령지역에서는 매달 100,000 명에서 250,000 명의 비전투원 사망 추정도 나왔다.
또한 일본 본토 침공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 지휘관들은 모두 400,000 명의 연합군 포로의 처형 명령도 받고 있었다는 보고서도 있다.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었다면, 소련은 일본을 침공하여 일본의 북반부를 점령했을 것이다.
소련과 소련이 점거한 동구권에 살아본 사람은 소련이 점거한 일본에서의 삶이 얼마나 비참할 것인지 알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모든 다른 죽음처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원폭 투하 결정은 일본의 전면 침공에 따를 보다 큰 비극을 막았다.
MUSIC
Beethoven-Violin Rommance
Violin: Ann Fontan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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