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man Reunification Message
Abstract:
The German reunification was the process in 1990 in which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GDR/East Germany) joined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FRG/West Germany) to form the reunited nation of Germany, and when Berlin reunited into a single city, as provided by its then Grundgesetz constitution Article 23.
The end of the unification process is officially referred to as German unity, celebrated on 3 October (German Unity Day).
Vast differences between the former East Germany and West Germany in lifestyle, wealth, political beliefs, and other matters remain, and it is therefore still common to speak of eastern and western Germany distinctly.
The eastern German economy has struggled since unification, and large subsidies are still transferred from west to east.
While the East German economy has recovered recently, the differences between East and West remain present.
Germans are inordinately preoccupied with the question of national integration. Social fractiousness is deeply ingrained in German history, giving rise to a desire to unify the "incomplete nation."
A review of economic and social measures of East-West, immigrant, and Muslim integration provides many indications of progress.
Nevertheless, social cleavages persist despite political integration. Indeed, in some aspects, including in the party system, fragmentation is greater now than it was two decades ago.
Yet successful social integration is a two-way street, requiring newcomers and oldtimers to interact.
Integration of the European Union to some extent has followed this German path, with subsidiarity ensuring a decentralized social model and limited cohesion.
German ambivalence about social integration is a major reason for the continuing social fragmentation of the society.
통일독일의 메시지
1990년에 통일된 독일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독일은 정치적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고, 이제는 라인 강이 아닌 엘베 강 기적을 바라보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전 세계에 군대를 파견하고, 유럽 통합의 견인 역할도 자임하고 있다.
독일의 통일은 동독 체제 내 민주세력의 개혁 주도와 동, 서독의 총선거를 통한 통일 요구의 분출 그리고 동, 서독 정부 간 통일 협상과 동독 의회의 서독 체제에의 자율적인 편입 결정 등으로 평화적인 통일이 실현될 수 있었다.
한반도의 통일 여건은 독일과는 상이한 점이 많고, 통일 과정도 독일과는 다르게 전개될 수 있겠지만, 평화적으로 추진되었던 통합 과정의 시사점을 분야별로 주의 깊게 분석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정치통합
남북의 통일이 실현된 후, 북한지역의 정치체제의 전환 과정에서 북한지역의 주민들을 대표하는 민주적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민주적 정치체제의 근간인 정당체제의 구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한지역의 직간접적 지원 속에서 진행될 이런 정치체제의 전환 과정에서 북한지역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자발적 판단과 참여 의지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체제가 외부적 영향에 의해 구성된다면 정상적인 운영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환경에서 남한지역의 정치세력이 북한지역의 대표성을 차지한다는 것은 삼가야하며, 북한지역 주민 스스로 대표세력을 형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대책과 노력이 필요하다.
독일은 통일 후 새로운 인물의 교체에서 동독정권시절의 현실정치에는 상대적으로 소원했던 과학 분야의 인물을 대거 기용했다.
북한지역도 이런 상황의 발생 가능성을 고려하여, 북한지역 인물을 발굴할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동독의 단일 지도정당이었던 사회주의 통일당 (SED)이 1990년부터 민주사회주의당 (PDS)으로 당명을 바꾸고, 통일 직후 통일 후유증에 따른 사회적 불만의 표출 과정에서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면서, 서독의 좌파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전국적인 정당으로 성장했다.
이것은 북한지역에서 독점적 지위에 있는 조선노동당이 남북의 통일 후에도 정치 집단으로 잔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며, 300만 명의 핵심 노동당원을 구심점으
로 형성될 정치세력의 등장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체제변환의 초기 과정에서 민주주의 체제의 구축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데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정책방안이 사전에 준비되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는 점이다.
북한지역은 주민들을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묶는 가장 확실한 결합 형태인 봉건주의적 사회주의 대 가정 (大家庭)체제방식을 사회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기본토대로 유지하여 왔다.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북한지역에서 정당정치 체제 운영의 근간인 민주주의 정치 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제이다.
따라서 민주적 정치 문화 발전을 위한 다각적 노력이 요구되며, 민주시민 교육 등 민주적 사고와 행동 능력을 신장할 수 있는 교육적 노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동독의 경우, 과거 정치사상 교육의 영향으로 동독지역에서 진행된 민주시민 교육에 대하여 주민들은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런 정치교육을 또 하나의 이념교육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체제를 위한 주입식 정치사상 교육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던 북한지역에서도 정치교육에 관한 거부 성향이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의식을 함양하는 민주시민 교육의 효과적인 시행과 그 성과를 성취하기 위한 철저한 사전준비와 노력이 함께 요구된다.
정치체제의 이식 (移植)은 빠른 기간 내에 이루어질 수 있겠으나, 민주주의 정치문화 신장에 적합한 인식의 변화는 중, 장기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둘째, 행정통합
행정통합은 둘 이상의 행정체제가 하나의 행정체제로 통합되는 것을 뜻하며, 독일통일에서 처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중앙 및 지방정부 조직의 변화와 행정구역 및 계급구조의 개편이나 조정, 공무원제도의 단일화와 국가통합에 따른 행정수요 대비책 등을 넘어 대규모의 행정 개혁을 이끌 수도 있다.
한반도통일 후, 새로운 행정체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는 통일한국의 정치체제와 이념, 통일방법과 시기, 통일 당시의 남북 행정체제 그리고 통일한국의 행정수요 등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지역의 사회주의적 관료주의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를 지방 자치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적 행정체제로 바꾸는 작업이 가장 우선적인 과제이다.
행정체제가 성공적으로 통합되어야 북한지역의 재건을 위한 일련의 과정이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이 행정통합은 대단히 중요하다.
현행 북한지역의 행정구역인 2직할시, 9도, 25시, 147군, 267노동자구의 행정체제를 사전에 조사, 연구하여 충분한 실상 파악이 이루어지면 행정체제의 개편작업이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추진될 수 있다.
동서독 행정체제 통합 과정에서는 초기에 동독 행정체제의 현황을 파악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났다.
행정 인력의 처리는 중요한 문제이다. 통일 후 북한지역의 행정체제의 구축과정에서 기존 행정 인력을 적절히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체제의 강력한 이념화 수준을 고려하면, 행정인력 선발 기준이 체제에 대한 충성심과 당성 (黨性)그리고 사상성 등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을 현실성 때문에 이들의 처리 방안은 신중하게 추진되어야 할 사안이다.
단순히 제도를 바꿀 뿐만 아니라, 중앙 중심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을 행정인력의 습성과 태도를 바꾸는 새로운 행정문화를 형성, 정착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부의 지시만을 수행할 뿐, 직접 움직이고 책임지는 것을 거부하는 공산주의 형 북한지역 인력의 관념을 바꾸는 것은 단기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과제이기도하다.
따라서 변화된 환경에서 요구되는 전문성과 새로운 체제에 대한 충성도, 그리고 새로운 행정업무의 성격에 적합한 인식과 인성 형성 등 다양한 도전을 받게 된다.
행정인력의 처리는 계속 활용할 행정인력과 감원 대상의 처리 등 기준의 설정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될 경우, 행정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
반대로 너무 관대한 기준이 적용되어 잘못된 과거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넘어갈 경우, 행정인력 처리 과정이 지니는 역사의 청산이라는 측면이 크게 퇴색될 수 있다.
행정체제 전환 과정에서 남한지역 인력의 지원은 필수적이다. 우수한 지원인력의 역할은 북한지역의 행정체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최초, 독일은 출장 및 파견 형태로 이뤄졌던 지원방식을 상주하면서 행정체제 작업을 지원하는 형태로 바꿨다.
그 인원도 1991년 1만 여 명에서 1995년에는 3만 5천 명으로 증원했으며, 직접적인 책임 권한과 풍부한 행정경험으로 행정체제 전환 과정에서 이 지원은 결정적인 역할을 다했다.
또한 동, 서독 간 자매결연을 통한 협력체계가 행정통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통일 초기 40여 개에 불과하던 규모가 1992년에는 2천 여 개로 확대되어, 인구 5만 명 이상의 동독 도시 대다수가 서독 자매결연 도시의 다양한 지원을 받았다.
셋째, 경제적 통합
동, 서독의 경제적 통합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부적절한 환율 채택과 너무 성급한 통화의 단일화 그리고 동독 시장을 과도기적 보호조치를 통한 경쟁력의 강화 없이 시장경제로 유도하여 동독 기업체의 몰락을 자초한 경제정책의 실패에 집중되고 있다.
또 하나의 비판은 실제 예산집행의 공정성과 실효성에 관한 것이다.
철도와 도로 건설을 제외하면 동독지역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직접 지자체들에 주어져 그 실제 사용 내역과 실효성의 검증이 미비했다는 지적이다.
산업인프라 구축에 투입되어야 할 예산이 놀이동산 조성과 같은 소비와 유흥분야에 쓰였거나, 인구 밀집지역이 아닌 곳에 건설된 공항이나 생산성을 고려하지 않은 동독지역의 빠른 임금의 정상화 등이 그 예이다.
실제로 구동독지역의 개발과 경기의 활성화로 발생된 국가 부채는 60년 동안의 서독의 부채를 상회하였음에도, 동독지역의 생산성은 서독지역의 생산성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의 노력의 결과, 산업인프라의 조성과 주거 여건, 소비와 서비스 분야에서 많은 발전도 있었다.
2008년도 동독지역의 서독대비 생산성은 79%, 임금은 81.5%를 기록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동독지역의 경제 수준은 서독의 80% 수준까지 올라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독일의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화폐의 1:1 교환과 같이, 경제적 고려를 무시한 정치적 결정이 통일 이후 큰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승 (戰勝) 4개국은 물론, 주변국 모두가 통일을 원치 않았던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에서 동독 주민들에게 매력적인 유인책이 없었다면 독일통일이 순탄하게 진척되었을까 하는 어려운 질문이 남는다.
독일통일은 준비된 통일이 아니었으며, 그에 따른 정책의 폭도 좁을 수밖에 없었다. 해외 경제 전문가들은 남북 간의 경제협력인 개성공단 프로젝트를 계획경제 체제에 자본주의를 심는 좋은 교육의 장으로 평가하고 있다.
분단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경제협력은 결과적으로 통일의 준비와 초석이 될 수 있고, 실제 통일비용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준비 없는 통일로 20 여년이 지난 지금도 사회간접자본에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도 동독지역의 자생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통일독일이 우리의 타산지석이 되는 이유이기도하다.
넷째, 사회통합
통일 후의 중요한 또 다른 측면은 정치적, 경제적 통합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삶의 만족도와 이것을 반영하는 문화적, 심리적 그리고 정서적 통합의 문제이다.
독일은 사회 내면적 통합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일 후 20 여년이 지난 지금도 동, 서독 간 주민과 지역 간에는 갈등이 남아 있다.
동, 서독보다 남북 간은 경제적 격차가 크고, 남북 간 전쟁의 상흔이 상존하는 한반도 상황에서는 이보다 더 큰 어려움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지난 20 여 년 동안 통일독일에 형성된 사회를 알아보는 척도는 독일 사회의 내적 통합 달성 여부이다.
그것은 2009년 1월 21일자 베를린 짜이퉁 (Berliner Zeitung)의 기사 “아직 도달하지 못함”제하의 기사가 그 해답이다.
동독지역에서는 1990년부터 매년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2008년 광범위하게 실시된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사회과학연구센터의 여론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이 여론조사는,
1. 동독인들은 사회, 경제 개혁의 대부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2. 대부분의 사회개혁 조치는 실제 생활과 연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3. 사회 안정은 경제 안정과 함께 정치적 안정을 의미한다.
4. 현재의 사회보장 체제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고 요약했다.
사회통합의 부정적 요소는, 젊은 노동력의 서독지역으로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중반 이후, 동독의 실업률은 계속해서 서독지역의 2배 정도를 기록하고 있다.
1995년~2007년 간 서독지역에는 250만 명의 노동자가 늘어난 반면, 동독지역은 35만 명이 줄었다.
동, 서독 간 임금 격차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동독지역 제조업 노동자 임금은 1995년 서독대비 73.6%, 2006년 74.7%에 불과하다.
생산성의 향상보다 임금 인상률이 항상 적게 정해지는 독일 임금협약의 특징이지만, 임금의 절대치는 더욱 심각하다.
재산 형성에서도 가구 단위별 동산과 부동산 형성의 평균 수준은 2003년 서독지역의 40%에 불과하다.
상이한 조건의 두 독일이 하나로 되는 과정의 성공 여부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정치와 경제, 문화,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한 참여의 기회와 성취 보장의 공정성을 보는 인식과 체험 등에서 나타난다.
사회구조적 측면에서는 노동시장과 교육기회의 공정한 배분은 개인이 정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동독지역의 인구는 1989년 1,870만 명에서 2006년에는 10%이상이 줄어 1,670만 명이며, 노동자는 1,080만 명에서 730만 명으로 줄었다.
인구의 격감은 낮은 출산율과 젊은 노동력의 서독 이주에 기인한다. 2004년에는 대부분 18세에서 30세의 인구가 이주자의 54%를 차지했다.
이 현상은 동독지역 전반에 퍼져있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현실에 대한 불만을 추정할 수 있는 통계이다.
독일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독일통일의 현 상태와 2020년까지의 전망”이라는 보고서는, 동독지역의 고 실업률과 저임금, 교육기회의 상대적 열세에 따른 노동력의 이주는 계속되어, 2020년까지 동독인구 1백만 명의 감소를 예상하고 있다.
2008년 6월의 또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서독주민의 55.9%, 동독주민의 57.3%가 통일이 많은 부정적인 면을 가져왔다고 표명했으며, 전체 독일인의 반 이상이 통일 이후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고, 1990년대 초반과 비교할 때, 독일 전체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동, 서독지역 간의 구조적인 빈부격차의 심화는 장기적으로 사회정의 실현에 대한 불만족과 사회분열로 이어지고, 정치와 교육에 대한 참여 보장의 실패는 실제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사회적 무력감을 낳을 수 있다.
문화면에서, 독일은 18세기에 형성된 독일민족의 문화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단 기간에도 지속적인 전통문화의 보존을 통해 이어왔다.
같은 역사와 언어 그리고 경계를 넘는 방송과 학계 및 예술계의 교류는 민족의 정체성의 맥을 잇는데 공헌했다.
이를 반영해 1990년 통일 전 동, 서독 정부가 체결한 “통일협정”은 예술과 문화는 독일민족의 계속적인 단합의 근거임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스포츠가 사회적 기능을 통해 국민의 보건과 여가생활 조성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에, 독일은 2차 대전 직후, 폐허가 된 나라에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주력했다.
1959년부터 15년 간 체육시설 투자계획인 “황금계획 (Der Goldene Plan)”의 추진으로 총 5만 건의 스포츠 시설이 재정비, 신축되었다.
통일 후에는 “동쪽 황금계획”이 동독지역에서 추진되어,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총 3억 3천만 유로의 투자로 460개의 스포츠 시설이 현대화 신축되었다.
통일 초기과정에서 동독주민들은 자신들이 민주적 가치와 자유시장경제의 규범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미래의 희망은 실제 통합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일상의 미흡함이 실망으로 바뀐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실망은 체제의 성과에 대한 실망이자 지난 20 여 년 간 일군 부 (富)가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에 불공정하게 배분되는데 대한 실망이고, 부의 창출에 기여할 기회가 적은데 대한 실망이다.
따라서 참된 의미의 내면적 사회통합은 정의사회를 실현하는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독일통일은 한반도에 통일의 기회가 도래하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빨리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민족 명운의 개척에 맞는 일임을 시사하고 있다.
주변 정세의 변화를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일 이후에 닥칠 어려움은 차분하게 장기적으로 극복해야 할 국가적 일상사일 뿐이다.
이를 위해 국민적 통일의지를 다시 다질 필요가 있음을 모두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MUSIC
Tosca-E lucevan l stelle
Puccini
Tenor, Luciano Pavarotti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