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o Difficult, Too Dangerous Theory
Abstract
This theory of unification emerged after the Cold War ended and the two Germanys united.
It was this period that we saw the first true empirical study of unification that went beyond political rhetoric.
Koreans watched German unification with deep envy, but the realities of how difficult unification would be also started to set in.
As cathartic as the German unification process might have appeared, in Republic of Korea unification started to be perceived as prohibitively expensive.
The newly evolving post-Cold War environment had catalyzed a change in perceptions about unification, especially in Republic of Korea.
While unification was previously seen as something desirable, it suddenly became something to be avoided because of the staggering costs and the terrible uncertainties.
Watching the Germans struggle with social, political, and economic integration caused Koreans to see more clearly the challenges of unification.
Suddenly, the theory that unification was too difficult and too dangerous emerged and took over a prominent place in policymaking and scholarship.
Korean unification was no longer perceived as a simple “winner takes all” scenario but as a complex process that would be messy and highly unpredictable.
During this period, there was an intense debate between two different schools of thought on the Korean unification process-“hard landing' versus ”soft landing.“
The two different schools of thought were related to four different scenarios for unification:
1. North Korean regime collapse.
2. War.
3. Gradual change in the North leading to peaceful integration.
4. Maintenance of status quo or “muddling through.”
Scenario one and two were associated with the “hard landing” school of thought.
On the other hand, a soft landing, most often associated with scenario three and four.
The hard landing theory of unification predominated Korean thinking from the end of the Cold War in Europe until the Asian financial crisis in 1997.
The death of Kim Il-sung in 1994 and the widespread famine in North Korea led many to predict an eminent collapse of the North Korean regime.
The retreat of communism caused an existential crisis for North Korean as its main source of economic aid and ideological legitimacy started to dry up.
Faced with a growing external threat, a failing economy, and a conventional military with increasingly deteriorating capabilities, North Korea seemingly shifted its strategy from “achieve unification at all costs” to “maintain regime survival at all costs.”
Korean unification was dominated by political discourse and even agreements, but without any serious study of its meaning.
What this period did show, however, was that new data does affect policy.
The first real attempt to collect data on unification came about through the case studies of German unification and its potential application to the Korean situation.
Additional studies also analyzed the estimated cost of unification. All of this set new parameters on how the Koreans and the world thought about unification.
극도의 고난과 위험성 이론
이 통일 이론은 냉전 종식과 독일 통일 후에 나왔다.
이 시기, 세상은 처음 정치적 수사 (修辭)를 넘어선 진정한 통일의 경험적 연구를 봤다.
한국인들은 독일 통일에 대한 깊은 부러움과 함께 통일 시작의 어려운 현실도 또한 봤다.
독일통일 과정의 가시화로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엄청나게 돈이 드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진화하는 탈냉전 환경은 특히 한국에서 통일에 관한 인식의 변화를 촉진했다.
이전에는 통일을 바람직한 일로 봤으나, 이제 엄청난 비용과 끔찍한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갑자기 뭔가 피해야 하는 대상이 됐다.
독일통일 이전에는, 한반도 통일의 절차나 구조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인들이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통합의 어려움을 겪는 것을 지켜보면서, 한국인들은 통일의 난제 (難題)를 더 확실히 느꼈다.
갑자기, 통일은 너무 어렵고 너무 위험하다는 말이 나오면서, 이 논리는 정책 결정과 학문 분야에서 눈에 띄게 퍼져나갔다.
게다가, 남과 北의 경제적 불균형에 대한 공포감 증대와 北 김 씨 일가의 세습적 독재 정권의 불안정성 증대는 통일 인식의 변화를 유발했다.
한반도 통일은 더 이상 단순한 “승자 독식” 시나리오가 아니고 사안을 난처하게 하고 매우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 기간 동안, 한반도 통일 과정에 대한 “경착륙 (硬着陸)”과 “연착륙 (軟着陸)”의 두 다른 학파의 격렬한 논쟁이 전개됐다.
이로써 문제를 사고하는 패러다임의 창출로 통일을 더 크게 이해하도록 추진됐다.
이 두 다른 학파는 네 개의 다른 통일 시나리오와 관련된다. 그것은:
첫째, 北정권의 붕괴.
둘째, 전쟁.
셋째, 北을 평화적 통합으로 이끄는 점진적 변화.
넷째, 현상 유지나 시간 끌기 전략.
시나리오 첫째 및 둘째는 “경착륙” 학파와 관련된다.
경착륙은 정권의 무능력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 및 군사 통제를 할 수 없어, 결국 정권의 해체와 극단적인 경우에 이르는 것이다.
반면에, 연착륙은 주로 시나리오 셋째와 넷째에 해당된다.
이는 선택적 경제 개혁의 점진적이고 통제된 이행으로 일부 시장경제의 특성을 떠맡는 중앙통제경제 (Command economy)를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정권 교체는 일어나지 않는다.
비록 이 두 학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책 분야와 학계에서는 경착륙 이론이 유럽의 냉정 종식으로부터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까지 한국인의 사고를 지배했다.
이 시기 경착륙 이론이 우세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994년 김 일성의 사망과 北정권의 광범위한 기근은 北정권의 저명한 붕괴 예측을 충분히 뒷받침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한국정부는 군벌, 우익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 정권으로 전환됐다.
한국 경제도 개발도상국 대열에서 선진국으로 서서히 진전했다.
게다가, 이 시기에 北정권의 통일 수사 (修辭)의 인식 변화가 있었다.
공산주의의 후퇴로 경제 원조의 주요 원천과 이념적 정통성이 말라버리기 시작함으로써 北정권의 실존적 위기가 됐다.
커지는 외부 위협과 실패한 경제, 그리고 점점 악화되고 있는 재래식 군사 능력에 직면한 北정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통일 달성”으로부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권 생존을 유지한다.”고 전략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한국의 노 태우 정부는 북방정책 (Nordpolitik)의 기치 아래 대북 참여를 시도했다.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1991.12)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1992.1)을 생산했다.
정치적 담론과 심지어 협정도 한반도 통일의 중심이 됐으나, 그 의미의 진지한 연구는 없었다.
노 태우 대통령 임기 중 소련 (1990년) 및 중국 (1992년)과의 외교 관계의 정상화는 北정권에 가혹한 타격을 주었다.
1992년 이후, 北정권은 모든 접촉을 단절하고 그 어떤 대화도 거부했다.
그 후, 김 영삼 정부도 화해 시도를 했으나, 평양의 의심을 받고 있는 핵무기 프로그램의 탄로 (綻露)와 1993년 핵확산방지조약 (NPT)탈퇴로 남북 간 불신은 더 깊어 졌다.
냉전의 해빙이 한반도 통일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 것으로 기대했으나, 전반적으로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국제안보환경은 이 문제의 진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北정권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걱정한 미국은 대북 정책이나 통일 연구에 전념할 시간이나 자원을 별로 갖지 못했다.
자신의 문제들을 다루던 중국 역시 동북아 안보 현상을 바꾸거나 한반도 통일 문제에 달라붙을 인센티브를 별로 갖지 못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보여준 것은, 새로운 데이터가 정책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 첫 실제 시도가 독일통일의 사례 연구와 한반도 상황의 잠재적인 응용 프로그램을 통한 통일 관련 데이터 수집이었다.
추가적인 연구 또한 통일 추정비용을 분석했다. 이 모든 것은 한국인과 세계인의 한반도 통일관에 관한 새로운 매개변수를 설정한 것이다.
이런 매개변수가 일단 설정되면, 이는 다음 십년간 경험 획으로 작용하게 된다.
MUSIC
Luciano Pavarotti-Nessun Dor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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